[최규철칼럼]신뢰 잃은 정권 증후군

  • 입력 2004년 9월 15일 18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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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국가보안법 폐지 발언으로 나라가 어수선하던 지난 주말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세미나에 참석한 이해찬 국무총리의 시국관이 궁금했다. 그는 1년 반 참여정부의 5가지 성과로 정경유착 단절, 권위주의 극복, 균형발전 정책 집행, 사회갈등의 원칙적 처리, 남북관계의 진전을 꼽았다. 그의 말대로 참여정부 성과를 나름대로 정리한 것도 처음인지 모른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자제했는지 몰라도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각한 시국에 대한 자기성찰이 없었던 것은 핵심을 빠뜨린 것이었다. 정말로 내세울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면 왜 나라가 이렇게 시끄럽단 말인가. 지금까지의 성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국정 기틀을 다져 나가겠다는 대목도 걸렸다. 꼬리를 물고 있는 사회적 분열을 끌고 가겠다는 것인지, 넘어가겠다는 것인지 해법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았다. 어찌 보면 이 총리가 도맡아 설명해야 할 사안이 아닌지 모른다.

▼리더십 불신 ‘위기상황’▼

사회 분열의 근본 원인은 정권이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신뢰 상실에서 나타나는 첫 번째 대표적 증세다. 대의민주주의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권한 위임이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당신을 믿겠으니 살림 잘해 달라’는 유권자들의 소박한 희망이 모아진 결과다. 그리고 대선 승리 후라도 신뢰를 유지해 나갈 때 정권의 존립 이유는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과연 어떤가. 대통령의 리더십을 못 믿겠다는 기류가 번지면서 나타난 것이 작금의 사회 분열과 혼란이라고 본다. 본보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3분의 2는 현 시국을 ‘위기상황’이라고 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왜 같은 말을 했겠는가. 무엇보다 국정이념에서 신뢰를 크게 잃었기 때문 아닌가. 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확산된 ‘친북’ 좌경화 분위기에서 비롯된 사회적 불안감은 급기야 대통령의 국보법 폐지 발언 후 폭발했다. 국가안보와 헌정질서 파괴를 우려하는 1500명 사회 원로들의 비상시국선언이 나온 것도 같은 이유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이 존치가 필요하다고 결론 내린 국보법을 대통령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고 했으니 누구 힘이 더 센지 가리는 싸움판이라도 벌이겠다는 것인가. 국보법 폐지론에 검찰 일각에서는 간첩 수사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하기야 최근 북한 간첩을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공안당국은 ‘이제 남쪽 땅에 북한 간첩은 없다’고 당당히 밝혀야 한다. 과연 그런가. 그렇지 않은 줄 더 잘 알 것이다.

여기서 그동안 틈만 나면 ‘법과 원칙’을 강조한 대통령의 다짐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묻고 싶다. 더욱이 대통령은 취임 때 헌법 수호를 맹세하지 않았는가. 그 대통령이 헌법기관의 입지를 뒤흔드는 발언을 했으니 어떻게 헌정 질서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것이며 국기(國基)의 안정성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이 지키는 법은 따로 있단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국보법 피의자의 재판 거부를 비롯해 곳곳에서 나타나는 공권력 경시 현상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나라 기강이 흐물흐물해지는 바람에 당장 일상의 길거리에서만 겪어야 하는 불편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신뢰 상실이 불러 온 법치의 와해 증세다.

▼대통령 말이 무서워질 때▼

여론을 귀찮아하는 것도 신뢰를 잃은 정권의 공통적 증세다. 당장 비판적인 언론이 못마땅해진다. 육체적 가혹행위를 했다가, 광고를 막아 숨통을 죄려 했고, 세무조사라는 칼을 들이대고 굴복시키려 했던 것이 여론혐오증에 빠진 역대 정권의 증세였다. 비판을 옥죄려는 해괴한 내용의 신문법이란 것을 주무르고 있는 현 정권도 어쩌면 그렇게 빼닮아 가는지 놀라울 뿐이다. 세계의 반듯한 나라치고 어디에 그런 족쇄법이 있는가. 신뢰 잃은 정권의 가는 길이 어디겠는가. 상향식 신뢰가 사라지면 하향식 독단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여론에 등 돌린 국보법 폐지와 수도 이전이 단적으로 말해 준다. 대통령의 한마디가 무서워지는 것도 또 다른 증세다. 국정 운영에서 행정부도 집권당도 이미 납작 엎드리기 시작했다. 두고 보라. 대통령은 더 무서워질 것이다. 결국 증세만이 아니라 불행한 행로도 닮아 가고 있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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