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증오’가 판치는 나라

  • 입력 2004년 9월 1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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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권세력에 묻는다. 지금 한국 사회를 끝 모를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과거사 청산’이 과연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희망찬 작업인가. 그렇게 해야만 ‘민족정기’가 바로 선다고 믿는가. 새롭게 세우겠다는 민족정기를 말하기 전 지금까지의 언행을 되돌아보라. 지금 집권세력은 역대 정권에서 보기 힘든 ‘증오의 정치판’을 벌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사회의 한쪽 편을 겨냥해 기회주의자, 보신주의자라고 비난하다가 급기야 ‘서울 강남 사람들’이란 지역을 특정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이 자신도 살아온 사회를 그렇게 증오하고 구성원을 저주하듯 매도하는 나라가 또 있는가.

▼살생부로 뭘 하려는가▼

취임 초 강조했던 통합이란 말을 대통령 스스로 요즈음엔 별로 쓰지 않는 것을 보면 통합은 이제 접어놓은 것 같다. 그렇다면 통합이란 처음 한번 걸쳐 놓는 수사(修辭)였단 말인가. 더욱이 대통령은 ‘좌익 항일운동’의 재평가까지 언명했다. 한마디로 이제부터는 한국 사회를 이런 저런 이유로 반으로 쩍 갈라놓겠다는 심사인 것 같다. 대통령의 사회와 구성원에 대한 증오 기류는 바로 지금 한국 사회를 틀어쥔 집권세력의 기본 저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집권세력이 과거를 들추고 있으니 그들이 말하는 민족정기가 저주와 증오에서 온전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권력 주변의 이런저런 단체들까지 나서 증오의 목소리를 더욱 높인다. 역사나, 민족을 한때의 정치세력이 독점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원죄(原罪)다. 민족정기란 대의가 이렇게 폄훼된 적이 없다.

증오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과거사 들추기가 진실을 규명해서 화해하고 보상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말을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친일이든 용공이든 선대(先代)의 행적이 드러나고 명단이 만천하에 공개된다고 하자. 한마디로 그것은 후대(後代)를 죽이는 살생부가 될 것이 뻔하다. 집권세력은 위력적인 살생부를 금고 속에 넣어 놓고만 있겠는가. 살생부를 만들겠다는 발상에 그 효용성을 십분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은 국가가 공인해 주는 연좌제다. 증오가 지배하는 정치의 피할 수 없는 결과다.

집권세력도 이를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과거사 들추기에 힘을 쏟아서 얻는 실익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마디로 정권 연장을 위한 대선 전략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지금과 같은 갈등의 와중에서 과거사 문제가 말끔히 정리될 것이라고는 권력 스스로도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 문제로 적과 우군은 분명히 갈릴 수 있다고 판단했을 법하다. 광복절 경축사는 대선에 대한 대통령의 전략적 의도를 읽게 한다. 대통령은 긴 시간 과거사 문제를 언급하면서 ‘친일 3대가 떵떵거린다’는 말로 ‘우군’을 부르면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구성을 제의했고 이어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정치권의 결단’을 촉구했다. 과거사 규명과 선거구 개편이 연설의 핵심이다. 언뜻 별개의 사안처럼 보이지만 감춰진 귀결점은 같다고 본다. 바로 대선 전략이다.

▼대선 전략 복선 깔려▼

그래도 집권세력은 과거사 청산과 선거 전략은 별개의 것이라고 양자간 고리를 부정하겠는가. 그렇다면 과거사 문제가 부각되면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를 ‘친일파 독재자의 딸’로 집요하게 공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박 대표가 야권의 잠재적 대선후보가 아니더라도 그랬겠는가. 너무 일찍 속셈을 드러낸 실수를 탓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은 며칠 후엔 반민특위를 언급하면서 ‘가슴에 불이 나고 피가 거꾸로 돈다’는 격렬한 말로 다시 우군을 독려했다. 벌써 집권 여당에서는 현행 소선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다. 과거사 규명 갈등은 대선 바람몰이 역할을 할 것이고 선거구 개편은 집권세력 확산에 일조할 것으로 본다. 이것이 정권연장 도식 아닌가. 이쯤 되면 과거사는 ‘정권 만들기’ 들러리에 불과한 셈이다. 과거사 규명이란 명분 뒤에 함정이 가려져 있다는 것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탄핵사태가 불거진 후 정권의 모습은 왠지 초조하고 뭔가 서두르는 것 같다. ‘증오의 정치’도 조급증의 산물이다. 정작 청산해야 할 것은 증오심이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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