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정재호]한국式 소프트파워 키우자

  • 입력 2005년 5월 25일 03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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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소프트파워(soft power)’가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과 같은 명시적인 힘(hard power)과는 달리 소프트파워는 상대에 대한 암묵적인 설득을 통해 자발적 순응을 유도하는 힘을 가리킨다.

‘연성권력’이 너무 기계적인 번역이라면 ‘매력’은 감성적 측면을 주로 부각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국가 간에 나타나는 소프트파워에 초점을 맞춘다면 아마도 ‘규범력(規範力)’이 더 적절한 번역일 듯싶다.

규범력이 갖는 엄청난 위력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발휘해 온 패권적 영향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의 힘이 세계 최대의 군사력과 경제력의 소유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자유, 인권, 민주주의와 같은 보편적 규범과 가치관의 확산을 위한 미국의 실천 의지에 국제사회가 긍정적인 여론으로 화답했다는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미국은 때로는 이중 잣대로, 또 때로는 국내 정치적 고려를 중심으로 힘을 사용하곤 했고 이에 따라 스스로의 규범력이 훼손됐으며 그 결과 전 세계가 지금 미국을 향해 품는 기대는 날로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세계인 불러모으는 흡입력▼

일본의 경우를 보더라도 규범력과 연관된 핵심적인 함의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한번도 성공하기 힘든 강대국화를 한 세기 동안에만 두 번이나 이루었던 일본이 왜 주변 국가들로부터는 그리도 호의적인 인식을 얻지 못하는가의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일 1970년대쯤에 일본이 의회의 입법 절차를 통해 주변국들에 대한 통절한 사죄와 배상을 하고 그 후에도 정치인들의 ‘망언’을 자기 통제할 수 있었다면 과연 일본이 지금도 처절히 ‘탈아(脫亞)’를 주장하고 있을지 의문이다.

중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미 ‘연권력(軟權力)’, ‘연역량(軟力量)’ 등의 개념을 사용하면서 규범력을 배양하기 위해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아직까지는 미국의 규범에 대응되는 원칙의 제시에 대부분의 힘을 쏟아 붓고 있지만 중국의 종합 국력이 커 나갈수록 수동적이기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규범력의 창출과 확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주변 국가들에 대한 중국의 흡인력 또한 덩달아 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현재 한국에서 사용되는 소프트파워의 개념은 크게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한류(韓流)’라는 광범위한 대중문화의 외국 진출을 가리키는데 이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소프트’라는 측면에만 관심을 치우치게 해 ‘파워’―상대의 인식과 행위를 바꾸는 능력―부분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소위 ‘표준(standard)’과 연관된 것으로 한국적 표준의 국제적 채택에 대한 관심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는 그 본질적 성격이 과연 소프트한 것인지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남게 된다.

남은 하나의 내용이 최근 정부에 의해 제시되었던 ‘전통적 평화추구 세력’으로서 한국이 갖는 도덕적 우위와 연관된 것이다. 6자회담 참여국 중 주도적으로 전쟁을 수행한 적이 없는 유일한 국가로서 한국이 갖는 윤리적 비교우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냉혹한 국제정치의 무대에서 규범력은 자신의 주권과 영토를 지켜 내고 또 자국민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군사력, 경제력 및 외교력의 바탕 위에서 힘을 갖는 것이지 현실적 힘의 뒷받침이 없이는 공허해진다.

▼도덕적 우위만으론 공허▼

‘전통적 평화추구 세력’이라는 담론이 국내외에서 설득력을 지니려면 국제정치 구조 내에서 인정받는 가시적 능력에 대한 구비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이보다 앞서 가는 규범력에 대한 강조는 바람직하지도 또 그리 유용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가져야 할 소프트파워에 대한 더욱 구체적이고 창의적인 접근이 절실한 시점이다.

정재호 서울대교수·국제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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