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士칼럼]이기준/실용성 높여야 대학 산다

  • 입력 2000년 8월 31일 18시 35분


최근 한 대기업 임원으로부터 “사람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무한경쟁시대의 국제무대에서 제대로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인재가 없다는 지적이었다. 매년 4년제 일반대학에서 배출하는 졸업생이 30만명이 넘는데 사람이 없다니…. 대학 교육의 한 축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부끄러움도 느꼈다.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우리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파출부를 해서라도 과외를 시키는 부모들의 자식 사랑으로 길러낸 ‘인재’들이 기업으로부터는 외면당하는 현실이 당혹스럽기조차 했다.

지식기반사회로 규정되는 21세기에는 급격한 세계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제적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일류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냉혹한 국제경쟁의 험난한 파고를 헤쳐나가야 하는 기업으로서는 경쟁력 있는 인재가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경쟁력은 창의적인 교육에서 결정되며, 바로 이 점에서 대학 교육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다. 창의력을 기반으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할 수 있는 대학은 21세기 지식기반사회의 원동력이자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서울대를 비롯한 우리 고등교육체계가 이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대학은 교육과 연구, 사회봉사를 그 사명으로 한다. 교육을 통해 우수한 사회지도자를 양성하고, 연구를 통해 기존 지식을 체계화하며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한편 그 지식을 실용화하는 것이 본연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평생교육과 사회전문가들의 계속교육에도 기여해야 할 것이다. 선진국 대학일수록 교육과 연구, 사회봉사를 균형 있게 요구하는 것 같다. 일례로 내가 아는 미국 대학의 한 교수는 부교수였는데 정교수로 승진하지 못하고 학교를 떠났다. 교육과 연구는 잘 하는데 현장과 사회경험, 즉 사회에 대한 기여가 부족하다는 것이 정교수로 승진하지 못한 이유였다고 한다.

상아탑에 갇혀 사회와 동떨어진 대학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좌우명은 실사구시(實事求是)다. 대학의 교육과 연구가 기업과 사회, 나아가 국가의 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혹자는 너무 실용에 치우쳐 기초학문을 경시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윤리적 철학적 배경이 배제된 생명공학이 인류의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있다.

또한 기초학문과 응용학문 사이에 학문간 학제간의 벽을 넘는 공동연구가 보다 효율적인 연구 결과를 창출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니 기초학문을 도외시한다는 지적은 올바르지 않은 것 같다. 학문의 퓨전(fusion)화를 위해서는 기초학문이 탄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의 대학 경쟁력을 통해 20년 뒤 그 나라의 경쟁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서울대는 1999년 국제과학논문인용색인(SCI) 지수 평가에서 세계 73위를 기록했다. 아직은 미흡하지만 1997년 126위, 1998년 94위에 이어 이번에 73위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성장성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 추세대로 발전한다면 20년 뒤 우리나라의 국제경쟁력에 대한 전망도 밝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서울대의 한 학부 졸업생이 세계 유수의 소프트웨어회사 본사에 바로 취직을 한 사례가 있다. 그 졸업생은 홍콩지사에서 면접을 보고 미국 본사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우리 기업들도 이런 인재를 원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부에서는 대학 교육의 개혁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학을 기능과 역할별로 구분하고 대학의 운영체계를 개선하고 교수와 대학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자는 것이 그 핵심이다. 정부 주도의 대학 개혁안에 대해 대학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대학, 특히 국립대학이 국민과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하고 이에 적합한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백년대계(百年大計)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10년지계(十年之計)는 갖고 국가의 동량을 길러낼 수 있는 올바른 교육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기준(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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