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은 듯 연기하는 배우, 삶이라는 무대 돌아보게 해[광화문에서/손효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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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합창하던) 배우들이 사라진 후 저 문을 열고 나오면 2400개의 눈동자가 제게 꽂힙니다. 저를 바라보는 2400개 눈동자를 보면 심장이 쪼그라듭니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 막공(마지막 공연)이 끝난 26일 밤 조승우 씨가 말했다.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된 이 뮤지컬은 그가 출연한 모든 회차 티켓이 순식간에 매진돼 예매 전쟁이 벌어지고 암표까지 기승을 부릴 정도로 화제 속에 막을 내렸다. 억울하게 아내와 딸을 빼앗기고 복수만을 꿈꾸는 이발사 스위니 토드 역을 맡은 그는 광기와 분노는 물론이고 유머에 때론 애드리브까지, 노련하고 집중력 있는 연기로 객석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런 그가 관객들과 처음 대면하는 매 순간이 그토록 떨린다고 털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묘하게도 분장을 지우고 배역에서 벗어나면 쓸쓸하고 고독함을 느낍니다. 좋은 이별이 있어야 좋은 만남도 있겠죠.”

말을 이어가는 그를 보며 모든 것을 오롯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배우의 무게감, 그리고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무대는 기댈 곳도, 숨을 데도 없다. 배우들은 “무대에 서면 발가벗은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실수를 해도, 연기가 성에 차지 않아도 ‘다시 한 번’은 없다.

수십 년을 연기한 베테랑 배우도 무대에서는 겸허해진다. 연극 ‘오구’, ‘친정엄마와 2박 3일’에 오랜 기간 출연해 온 강부자 씨는 “아침에 눈을 뜨면 예불부터 시작한다. 오늘 공연도 무사히 끝나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한다. 공연 전에는 언제나 긴장된다”고 했다.

믿을 건 연습과 자기 관리뿐이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해 ‘세일즈맨의 죽음’ ‘사랑해요 당신’, 현재 공연 중인 ‘그대를 사랑합니다’까지 65년째 무대에 서고 있는 이순재 씨는 대사 암기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그는 “기억력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들 이름을 외운다. 좋은 대통령도 외우고 쭉정이도 외운다(웃음). 조선시대 왕 이름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명산들은 위에서부터 내려가면서 외운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그렇게 성장한다.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무대만큼 냉정하게 보여주는 곳이 없기에. 살다 보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발가벗은 채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온다. 그럴 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피하는 것도, 부딪쳐 보는 것도 스스로 정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를 감당하는 것 역시 자신의 몫이다. 연극 ‘미스 프랑스’ ‘멜로드라마’ ‘아트’에 출연한 김성령 씨의 말이 떠오른다.

“무대에 서면 부족한 게 많다는 걸 계속 확인하게 됩니다. 두렵죠. 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애쓰면 조금씩 채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그만큼 나아지고 있는 거라고 믿어요.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사로잡혀 도전 자체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고요.”

그렇게 배우들과 무대는 우리네 삶을 비춘다.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과 어떤 마음으로 내 인생의 무대에 서 있는가.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배우#조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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