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파고든 한류… 영향력만큼 책임도 커졌다[광화문에서/손효림]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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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림 문화부 차장
손효림 문화부 차장
“빅뱅의 노래를 듣고 가사의 의미를 곱씹으며 자랐어요. 항상 빅뱅의 음악이 저를 감싸고 있었죠. 제 유년 시절과 사춘기는 빅뱅을 빼고 얘기할 수 없답니다.”

지난해 어머니, 형과 함께 한국을 찾은 프랑스 대학생이 말했다. 한국을 여행한다는 설렘에 가득 찬 그의 두 눈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버닝썬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 빅뱅의 전 멤버 승리가 성매매, 업무상 횡령 등의 혐의로 수사를 받으며 연일 뉴스에 등장하고 있을 때였다. 남학생은 이 소식을 모르는 듯 해맑게 빅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고 기자는 가슴을 졸였다. 빅뱅의 노래를 문제 삼는 건 아니지만 승리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나요?’

한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각국 팬들의 삶에 미치는 파장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한국 문화를 공부하겠다며 진로를 바꾸고, 케이팝을 들으며 자신감을 키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방송인으로도 잘 알려진 카를로스 고리토 주한 브라질대사관 교육관은 “따돌림을 받거나 외로움에 시달려도 한류 덕분에 엇나가지 않고 삶의 중심을 다잡는 브라질 학생이 많다”고 말했다. 마초 문화가 상대적으로 강한 브라질에서는 덩치가 작거나 여린 외모를 지닌 남학생들은 놀림 받고 왕따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상처를 받은 학생들은 한류 스타를 보며 남성이 우락부락하지 않아도 매력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 큰 힘을 얻는다고 한다. 케이팝을 들으며, 남들과 달라도 괜찮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오래전 멕시코와 쿠바를 여행했을 때였다. 현지인들은 눈만 마주치면 “코레아?”라고 묻더니 “피에스와이(PSY·가수 싸이), 피에스와이!”라고 외치며 ‘강남 스타일’의 말춤을 흥겹게 췄다. 지구 반대편까지 퍼져 나간 한류의 힘에 깜짝 놀랐다. 이제 한류는 즐겁고 신나는 문화 콘텐츠를 넘어선 듯하다.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는가 하면 때로 인생까지 바꾸는 힘을 지니게 됐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이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의 삶에 크든 작든 파장을 일으킨다는 건 그만큼의 무게도 감내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아이돌 그룹 선발 프로그램의 순위 조작 사건을 비롯해 스타들의 일탈 행위가 수시로 터져 나온다. 사람 사는 세상에 사건 사고가 없을 순 없다. 다만 한류 스타들과 제작진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자신이 만드는 콘텐츠가 누군가의 인생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주면 좋겠다. 뜨거운 환호에 그저 취하기보다는 환호를 보내는 이들의 마음과 삶을 헤아린다면 행동은 물론이고 판단 하나하나가 좀 더 신중해질 수 있을 것이다.

강력한 영향력은 근사하고 화려하다. 그에 걸맞은 책임감도 함께 커질 때 세계인의 마음을 진정으로 사로잡을 수 있는 한류가 뿌리내릴 수 있다. 보다 깊숙하고 단단하게.

손효림 문화부 차장 aryssong@donga.com
#한류#승리#버닝썬#싸이#강남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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