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서지문]고마운 정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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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대학에서 전임교수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어느 은퇴하시는 교수님의 정년퇴임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주인공이 몹시 섭섭하고 허탈해 하시는 것 같아서 ‘축하한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이후로 정년퇴임하시는 선생님들께 드릴 적절한 인사말이 늘 고민스러웠다.

그런데 내가 5년 전에, 정년을 5년 앞두고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수술환자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확률은 통계적으로는 몇 만분의 1이겠지만 당사자에게는 깨어나거나 못 깨어나거나 둘 중의 하나이니까 정확히 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에 떤 것은 아니고 그냥 관념적으로 그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때, 이미 ‘6학년’ 진급을 했으니 그대로 깨어나지 못해도 그리 억울할 것이 없고 밥만 축내며 산 것은 아니니 그리 죄스러울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정년은 마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년이라는 것이 한 사람 몫의 일을 해냈고 한 사람 몫의 수명을 누렸다는 보증서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그때부터는 정년퇴임하는 선배 교수께 ‘축하한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이제 내 자신이 기다리던 정년퇴임을 하게 되니 안도와 약간의 긍지가 느껴진다. 넬슨제독처럼 “나의 모든 의무를 수행했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꾀 안 부리고 살았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와 친한 모든 제자, 동료, 지인들이 나의 정년퇴임을 마음껏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으면 좋겠다.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나이를 먹고, 나이와 함께 세상 이치를 깨달아가게 된다는 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다. 젊었을 때는 압축해서 세상경험을 하고 압축해서 지혜를 터득했으면 하는 조급증이 일었는데 부질없는 일이었다. 세상에는 나이를 먹어야만 터득할 수 있는 이치가 있다. 그리고 시간은 깨달음의 필수 소재이다.

나에게 있어서 오래 산 가장 큰 보람은 그동안 쌓은 인간관계이다. 물론 인간관계는 인생에서 가장 큰 축복일 수도 있고 가장 큰 불행일 수도 있다. 사람에게서 느끼는 실망이나 배신감처럼 뼈아프고 생의 의욕을 박탈하는 일이 또 있겠는가. 그래도, 배신이 두려워 사람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사는 삶에 무슨 기쁨과 보람이 있겠는가.

나의 경우, 나의 순수한 호의를 상대편은 이용하려 했다는 씁쓸함을 느낀 일은 있지만 인간미 넘치는 분들, 사표가 될 만한 분들을 훨씬 많이 만났고, 이것이 나에게 생의 기쁨을 넘어 살아갈 힘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처럼 생존에 부적합한 유전인자를 타고난 사람이 이날까지 생존한 것이 신기하다. 완벽한 길치, 몸치, 음치, 기계치에다가 상황이 공교롭게 오해를 받기 좋게 되든가, 누구를 위해서 한 일이 그를 해치려고 한 일처럼 되어 버려도 변명을 못하는 백치이다. 남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곧잘 나서도 내가 당한 억울함은 항의하다가 울먹이게 될까 봐 꿀꺽 삼켜버린다.

‘눈치’나 순발력은 약에 쓰려 해도 없고 동작은 둔해 빠졌고 적절한 대꾸는 언제나 한 박자 늦게 생각나는 원조 ‘형광등’이다. ‘하나님이 유전자를 몇 개만 업그레이드해 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았지만 이제는 나의 어리석음과 부족함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을 달래고 설득하기 쉬워진 것이 바로 나이가 가져다 준 선물이다.

이제 정년퇴임을 맞아 ‘의무’와 함께 ‘책임’도 면제되었다고 할 수 있겠으니 남은 날들을 조금은 나를 위해서 살고 싶다. 한국문학작품의 영역작업으로 국민의 의무에 갈음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그동안 못 읽은 책도 읽고 전시회도 섭렵하려 한다. 조선왕릉, 기타 전국의 문화재를 하나씩 찾아보는 고급 낭만도 못 누릴 바는 아니지 않겠는가? 인터넷과도 친해져서 그 무궁무진한 정보의 바다에서 자맥질도 해보려 한다. 그러면 나의 어리석음과 모자람이 위로를 받지 않겠는가?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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