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전으로 밀려난 민생경제[동아광장/이인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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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국 패권다툼에 韓경제 흔들… 개인-기업 가리지 않고 파산 증가
이 와중 정부는 애국주의 말잔치만
세금 쓰기 포퓰리즘 이제 그만두고 겸허한 자세로 민생대책 마련하라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는 시처럼 산을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이름 모를 꽃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하산 시에는 아래를 내려다보고 조심해 걷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 현실은 반대로 가는 듯하다. 글로벌 경제 여건이 당초 예상보다 악화돼 경제가 어렵다는 것이 정부 핑계지만,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한 1분기까지만 해도 세계경제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부턴 세계경제도 본격적으로 하산 길로 들어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지난달 10년 7개월 만에 정책금리를 0.25%포인트 내렸다. 제롬 파월 의장은 장기금리 인하 주기의 시작이 아니라 ‘중간 조정단계(Mid-Cycle)’라고 신중하게 표현했지만, 2분기 성장률이 전기 대비 반 토막이 난 유로존도 9월 정책이사회에서 금리 인하 및 채권 매입 재개 등 양적완화 조치를 실시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한국 경제에 대해서도 주요 해외 경제분석기관들이 일본의 대한국 수출 규제가 예상보다 장기화하고 경제 및 금융시장에 대한 하방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게다가 북한까지 한국을 둘러싼 다섯 나라가 일제히 한국의 경제와 안보를 위협하며 패권다툼을 벌이고 있다.

이 와중에 직격탄을 맞고 있는 민생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대기업도 걱정이지만 개인들과 영세업자들은 그냥 삶을 지속해 내는 것만으로도 발버둥을 쳐야 하는데 이를 실현해야 하는 정치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앞세운 거시적 말잔치 놀음에 빠져 있다. 큰 밑그림 없이 개개인의 삶을 개선해 주겠다는 입장을 강조하는 정책 뒤에는 영락없이 포퓰리즘이 난무한다.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비전을 내세운 정부는 출산장려금, 영·유아 보육비, 고교 학자금, 청년 실업수당, 병원 치료비 지원, 나아가 농민수당에 이르기까지 언급하는 것만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많은 정책을 집행했다. 그런데도 국민들의 삶은 더 오리무중이다.

가계부채 부실 위험이 더 커진 가운데 연체자,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개인채무자가 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전국 법원에 접수된 개인파산 신청은 2만2924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8.2%, 개인회생 신청도 4만7459건으로 지난해 상반기 대비 6.9% 증가했다. ‘청년실신’(청년실업+신용불량) 시대라는 신조어를 반영하듯,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30세 미만 청년 가구주의 평균 부채는 2012년 1283만 원에서 매년 증가해 2018년에는 2397만 원으로 6년 만에 87%가 늘었다. 20, 30대 사회초년생(3년차 이하 직장인)의 44%가 대출이 있고, 금리가 높은 제2·3금융권을 이용하는 비중이 전체 세대에 비해 4.3%포인트나 높다는 신한은행 보고서가 안타까운 현실을 설명해준다.

기업들 형편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올해 상반기 파산 신청 건수가 485건으로 사상 최고치고, 처음으로 회생 신청 건수를 넘어섰다. 임금체불액은 8459억 원으로 이 같은 추세라면 역대 최고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은 근로계약서도 없이 일하다 월급도 받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은 서민층으로, 지난해 1인당 평균 임금 총액이 338만 원에 불과했다.

임금체불액이 늘어나면서 도산, 사업주의 도덕적 해이 등으로 임금과 퇴직금 등을 받지 못한 근로자에게 고용노동부가 대신 지급하는 체당금도 2018년 3740억 원, 올해 상반기만 1869억 원에 달한다. 특히 2015년 소액체당금 제도 도입 이후 일반 체당금은 감소 추세인데, 소액체당금은 2016년 1280억 원에서 2018년 1865억 원으로 2년 사이 46%나 늘었다.

해외발 외생적 경제 충격은 우리 경제의 취약점을 살피고 잘못된 정책을 가다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권은 민생경제에 대한 근본적인 대응 방안을 내놓기보다 서로 비난과 변명, 책임 공방만 하며 포퓰리즘적인 세금 쓰기 경쟁에 몰두해 있는 것 같다. 과도한 위기감을 조장하지 말고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을 살피는 겸허한 심정으로 민생경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혼란한 경제 상황을 틈타 국민이 원하는 것은 다 해주겠다는 정치인과 그들의 포퓰리즘은 나라 경제를 파탄으로 이끄는 ‘악마의 속삭임’이다. 파탄에 이른 민생경제가 안 보이는가? 못 본 척하는 것인가?

이인실 객원논설위원·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민생경제#기업파산#임금체불#가계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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