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자본의 생산성을 높여라[동아광장/하준경]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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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과잉 시 고인 물 썩듯 경제 정체
불로소득 진입장벽 일감 몰아주기 횡행… 정공법은 인적자본-지식-기술 혁신
시장에서 해결 못해 정부 재정 필수… 초기에 과감하게 지출해 추진력 내야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자본주의 경제를 움직이는 핵심 변수는 자본의 수익률이다. 자본은 수익률을 좇아 물 흐르듯 돌아다니며 몸집을 키운다. 문제는 자본이 너무 많아 수익률이 낮아질 때 발생한다. 자본이 갈 길을 못 찾으면 고인 물이 썩듯 경제가 정체된다.

자본 수익률을 높이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자본을 파괴하는 것이다. 자본들 간의 경쟁이 심해지는 상황에선 남의 자본이 파괴되면 내 자본이 희소해져 수익률이 높아진다. 자본 파괴는 전쟁이나 공황 같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일어나기도 한다.

이보다 일상적으로 쓰이는 방법은 지대 추구다. 자본이 흔해져 자본 생산성이 떨어지면 무언가를 생산하는(make) 것보다 남의 것을 가져오는(take) 행위의 수익률이 더 높아진다. 자본력으로 좋은 땅을 선점해 불로소득을 얻거나 진입장벽을 쌓아 경쟁을 막는 행위, 단가 후려치기나 일감 몰아주기로 다른 이들이 누릴 수익을 가져오는 행위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좀 더 시장적인 방법은 자본이 움직이는 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금융비용과 노동비용을 낮추고 법인세를 깎아 수익률을 높인다. 투자할 곳은 많은데 단기적으로 애로가 생겼을 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 과잉을 해소하는 근본 대책은 아니다. 예컨대 초저금리는 자본의 홍수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넘치는 돈은 모두의 갈증을 해소하기보다 강자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쓰이기 쉽다. 땅값을 폭등시켜 투자 유인을 왜곡하고 가계 빚과 불평등을 악화시키기도 한다. 구조조정이 늦춰지면 수익률은 더 떨어진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여러 나라가 경험한 현실이다.

가장 좋은 정공법은 자본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자본과 결합하는 요소인 노동의 질, 즉 인적 자본을 확충하고, 지식과 기술을 혁신하는 것이다. 제도 개선도 도움이 된다. 똑같은 컴퓨터라도 어떤 수준의 인력과 결합하느냐, 어떤 소프트웨어를 쓰느냐에 따라 생산성이 달라진다. 또 제도에 따라 요소들의 만남 자체가 가능할 수도, 불가능할 수도 있다. 자본의 생산성은 궁극적으로 자본과 결합하는 변수들의 수준에 달려 있다. ‘과잉 자본’도 이 변수들에 비해 과잉이란 것이니 문제 해결의 길은 자명하다.

그러나 자본 생산성을 결정하는 인적자본이나 지식, 기술, 제도는 모두 공공성이 커 시장이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인적자본 투자, 즉 교육은 사회적 지위의 대물림과도 관련되니 시장에선 왜곡되기 일쑤다. 지식과 기술은 많은 이가 함께 누리는 공공재가 되므로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해 시장에서 충분히 공급되지 않는다. 제도 개선도 기득권을 다루는 일인 만큼 사회안전망 같은 공적 지출 없이는 어렵다.

결국 자본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정부 재정이 필수적이다. 사람, 지식, 기술에 대한 투자, 제도 개혁 모두 공공재를 쌓는 일이다. 미국 브라운대의 오데드 갤로어 교수에 따르면 서유럽에서는 이미 19세기부터 자본가들이 앞장서서 노동자들을 교육시켜 달라고 의회와 정부에 로비를 했다. 최근 유럽은 저출산 때문에 인력 축소가 예견되자 각국 정부가 매년 국내총생산의 2∼4%, 즉 우리의 두세 배를 써서 추세를 반전시켰다. 지식, 기술 분야에서도 미국 등 선진국 정부는 첨단, 기초연구에 대규모 장기 투자를 계속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저출산, 제조업 구조조정, 무역환경 변화 등을 맞아 공공재를 확충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낡은 개도국형 성장 방식을 선진국형으로 전환하는 궤도 수정도 절실하다. 궤도를 바꾸려면 재정 투입도 과감해야 한다. 과거 일본이 재정을 늘릴 때 조금씩 간헐적으로, 그나마 ‘다람쥐 도로’ 같은 엉뚱한 토건사업에 돈을 써서 효과를 못 봤다는 지적이 많다.

미사일을 쏠 때도 초기에 방향을 잘 잡고 연료를 많이 써 강한 추진력을 내야 더 멀리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다. 연료를 아낀다고 ‘찔끔찔끔’ 쓰다가는 목적지엔 가지도 못한 채 연료만 더 소모한다. 마침 우리는 넘쳐나는 유동자금이라는 연료가 창고에 가득하다. 이것을 묵혀 버리거나 속절없이 부동산으로 흘려보내기보다는 정부가 국채 발행으로 흡수해서 지금까지 과소 공급됐던 공공재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과감히 써야 한다. 그것이 자본 생산성과 노동 소득을 모두 높이는 길이다.

하준경 객원논설위원·한양대 경제학부 교수
#자본주의 경제#자본 수익률#일감 몰아주기#한국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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