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와 민주주의 [동아광장/김석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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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정책에 공론조사 반영한 文정부
시민 신뢰도 높였지만 갈등은 숙제
향후 외교정책도 ‘시민의 지혜’ 기대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 지나면서 경제, 정치, 외교, 통일, 사회통합 성과에 대한 평가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경제 침체, 소득 격차 심화, 고용지표 부진, 대북 관계 교착, 여의도 정치 실종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룬다. 한국갤럽이 5월에 발표한 집권 2년에 대한 국민 인식에서도 비슷한 흐름이다. 나아진 분야는 없을까. 나는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포함조차 안 된 어느 한 분야에 눈길이 간다.

숙의(熟議)를 통한 민주주의의 질 향상. 현 정부는 정치 과정에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제도를 시행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학습과 토론에 바탕을 둔 숙의민주주의, 즉 공론조사다. 이 제도는 정치권과 관료가 독점해 온 정책 결정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과정을 공개해 정책의 정당성과 책임성을 강화하려는 시도다. 좋은 민주주의란 결국 어떤 위치에 있고, 얼마나 가졌는가에 관계없이 자신의 목소리를 표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므로 이 시끄러운 절차를 거쳐 합의에 도달하고, 이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는 과정은 매력적이다. 전문성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정책에 관여한다는, 시민 역량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어 희망적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이 신고리 5, 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보고를 수용해 건설 재개를 결정했을 때, 찬사와 기대가 넘쳐났다. 하지만 나는 당시에 현장에 있으면서 다소 다른 생각을 했다. 시민이 국가 중대사를 자유롭게 토론해 그 기록을 정치 지도자가 참고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도입된 공론조사에서 원자력발전소 건설 재개와 반대로 갈린 양측의 갈등이 더 심해졌기 때문이다. 최종 승자는 정치적 결단을 시민사회에 전가한 대통령과 관료뿐이란 비판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사회통합을 위해 도입된 공론조사로 인해 갈등이 심화하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봐야 할까. 신고리 공론화가 기대 이상의 정치적 성과를 거두면서, 이후 실시된 대부분의 공론화가 이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 제주 녹지국제병원, 대전 월평공원 민간특례사업, 광주 도시철도 2호선에 대한 공론화에서 승자와 패자 간 반목이 심화하는 현상이 여전히 발견된다. 민주주의의 질은 공론화를 통해 향상되고 있는 것일까.

신고리 공론화가 채택한 표결에 의해 승자와 패자가 나뉘는 방식은 여러 공론조사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사실 숙의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는 학습과 토론이 이뤄지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정에서 산출된 기록은 최종 결정 시 유용한 자료로 활용된다. 즉 숙의민주주의의 핵심은 승자와 패자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나 기존 공론화는 입장을 달리하는 집단 중 누가 이길지를 선택하도록 강제하기 때문에 공론조사라는 민주주의의 질과 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제도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 충실한 학습과 토론을 통해 창발할 수 있는 시민의 지혜를 포기한 것이다.

승패만이 중요해지면, 공론조사의 의제와 시행 여부를 정할 때 정치인, 관료, 당사자의 이해와 탐욕이 개입할 가능성도 커진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정책 결정 과정의 정당성과 책임성을 높이는 공론조사가 아니라 정치인의 책임 전가용, 관료의 면피용, 이해집단의 명분 쌓기용으로 악용될 수 있다. 공론조사는 자주 열리지만, 실제 정책에 반영할 숙의의 기록은 영원히 묻힌다. 이긴 자와 진 자, 지지하는 자와 반대하는 자, 관계자의 자화자찬만 남는다. 국민은 이런 공론조사의 결론을 알고 싶지도 않고 수용할 이유도 없다.

물론 희망적인 사례도 존재한다. 외교부의 국민외교. 모두에게 생소할 이 제도는 외교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을 반영함으로써 정책의 장기적 안정성과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외교부는 올 2월 ‘외교정책에 대한 시민 참여형 정책선호조사’를 수행했는데, 이 조사가 차별성을 가지는 이유는 그 목적이 갈등의 단기적 해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향후 외교 방향과 내용을 정하는 데 필요한 지혜를 시민들의 학습과 토론을 통해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갤럽의 조사 결과 중 찬반의 부침이 유독 심하고 그 평가가 극명하게 나뉘는 분야가 외교와 대북 정책이다. 외교정책의 책임성을 시민의 힘으로 세울 수 있는 이 실험이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질 향상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일본군 위안부 협상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결정으로 한일, 한중 관계가 날로 악화되고 있다. 그 당시 외교부가 현재의 외교부였다면 동북아 외교 지형은 지금 어떻게 변했을까. 외교부의 기본에 충실한 창의적 시도를 정치권과 다른 관료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김석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문재인 정부#한국갤럽#숙의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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