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소연]햄버거도 못 사는 세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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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가던 가게에 들어선 무인판매대
조그만 글씨로 복잡한 과정 요구, 간단한 음식 사먹기도 힘들어져
스마트폰 없는 사람이나 노인은 어쩌나
효율-첨단 빙자한 약자 배제 아닌가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법률사무소 보다 변호사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법률사무소 보다 변호사
야근을 할 때 자주 가던 사무실 앞 패스트푸드점에 얼마 전 무인 주문대가 생겼다. 입구에 서 있는 이 ‘키오스크’는 꽤나 위압적인 덩치를 자랑한다.

나는 키오스크가 익숙한 세대인데도, 늘 먹던 세트 메뉴를 찾고 주문하는 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우선 큰 화면 속 글자와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 읽었다. 원하는 메뉴를 찾고 손가락으로 눌러 보았다가 손톱 끝을 세워 보았다가 하며 연신 화면을 눌러댔다. 끝난 줄 알았더니 웬걸. 사이드메뉴며 음료를 또 선택하란다. 마침내 카드를 삽입하라는 문구가 나왔다. 신용카드를 앞으로 넣었다 뒤집어 넣었다를 반복했다. 그제야 간신히 주문번호와 영수증을 받을 수 있었다.

방심할 틈도 없이 의자에 앉아 손가락 두 개만 한 종이쪽지에 쓰인 번호와 안내 화면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며 내 순서가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목이 슬슬 아플 때쯤, 비로소 저쪽에서 사람이 나타나 말한다. “삼백팔십육 번 고객님, 주문하신 메뉴 나왔습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 같은 사례는 도처에 널렸다. 몇 해 전부터 고속버스 유인 매표소가 크게 줄었다. 현금을 갖고 다니지 않아도 휴대전화 애플리케이션(앱)으로 편리하게 승차권을 살 수 있어서다. 종이 승차권 없이 모바일 승차권으로 탑승할 수 있으니 좋아진 것이라고들 했다. 실제로 나는 휴대전화로 고속버스의 잔여 좌석을 확인하고 미리 예매를 해 두었다가 시간에 딱 맞춰 터미널에 간다.

그렇지만 이 일련의 과정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우선 스마트폰이 있어야 한다. 무선인터넷이나 데이터망에 접속할 줄 알아야 하고, 통신비용을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 앱 설치법을 알아야 한다. 휴대전화의 작은 글자를 무리 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작은 화면에서 더 작은 자판을 틀리지 않고 눌러 출발지와 목적지를 선택한 다음 역시 새끼손톱만 한 ‘검색’ 버튼을 누를 수 있어야 한다. 화면을 ‘스크롤’할 줄도 알아야 한다. 신용카드가 있어야 한다. 휴대전화에서 신용카드로 결제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모바일 승차권을 화면에 띄울 줄 알거나 고속터미널의 무인 발권기에서 신용카드로 무인 발권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일을 할 줄 모르면 고속버스 터미널까지 가서 만석 아닌 시간대의 버스표를 뒤늦게 현장에서 구매한 다음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눈이나 손이 불편해도 마찬가지일 터다. 버스 한번 타기가 이렇게 어렵다.

기차도 별반 다르지 않다. 휴대전화 코레일 앱이나 홈페이지로 예약하면 기다릴 필요 없이 좋은 자리를 고를 수 있다. 그렇지만 앱 설치, 회원 가입, 본인 인증, 신용카드 혹은 휴대전화 결제를 할 수 없다면 역에 길게 줄을 서야 한다. 올해 설 명절을 앞두고 기차표 예매를 위해 서울역에는 어김없이 많은 인파가 몰렸다.

줄을 서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문제는 휴대전화, 신용카드가 없는 사람들이나 이런 앱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없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줄을 아무리 서도 애당초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좋은 자리를 미리 고르는 것도, ‘온라인 쿠폰’으로 할인을 받는 것도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쓸 줄 알아야 가능하다. 이것이 어려운 사람들은 어딜 가든 한참을 기다리거나,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하거나, 남에게 부탁해야 한다. 기차역에서 어르신의 발권을 도와드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표 한 장을 사려고 노인들이 생면부지의 젊은이에게 돈이나 신용카드나 개인정보가 잔뜩 담긴 휴대전화를 건네며 부탁을 해야 하다니 너무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 심지어 4900원짜리 햄버거 세트도 그렇게 고생스럽게 사라니!

세상에는 몇 살이 되어서든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햄버거 사기가 그런 배움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일일까? 새해 일출 보는 버스 한번 타 보기가 이렇게 힘든 것이 최첨단이니 편리함이니 하는 말로 적당히 포장할 수 있는 문제일까?

햄버거 사기가 어려우면 분식집에 가라고 할 일이 아니다. 터미널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라 할 일이 아니다. 아예 어떤 서비스를 이용조차 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늘어나는 변화는 결코 발전이 아니다. 효율과 첨단의 탈을 쓴 약자 배제일 뿐이다.
 
정소연 객원논설위원·법률사무소 보다 변호사
#무인판매대#키오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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