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소영]나는 혁신에 반대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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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에 대한 대표적 오해는 ‘새롭고 빠르고 놀랍다’는 것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 그들이야말로 같이 가야 할 존재
근본 외면하면 피로감만 줄 뿐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세상 모든 게 기적이라고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적이란 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 둘은 어느 게 맞고 틀리느냐 혹은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의 문제다. 개인의 인생관만이 아니라 가족 살림, 조직 경영, 사회 거버넌스 등 다양한 차원에서 변주되는 가치관이기도 하다.

혁신을 좋아하고 바라는 개인과 조직은 세상 모든 게 기적이라고 믿는 쪽에 가깝다. 혁신을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개인과 조직은 세상에 기적이란 없다고 믿는 쪽에 가깝다. 지금보다 젊었을 적 나는 전자였지만 예전보다 나이 든 지금 나는 후자다.

혁신만큼 남용되는 단어는 드물다. 놀라운 기술부터 근사한 상품, 멋진 서비스, 기발한 아이디어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혁신은 자동으로 붙는 수식어가 되었다. 2012년 월스트리트저널에서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제출된 기업 실적보고서에 혁신이란 단어가 총 3만3528번 나오는데 5년 전에 비해 64%가 증가한 수치라고 보도했다. 재미있는 것은 대표적 정보기술(IT) 기업 구글의 실적보고서에서는 14번 언급되었는데 앤디 워홀의 깡통 수프 그림으로 유명한 회사 캠벨 수프의 실적보고서에는 18번 언급되었다는 점이다.

가히 세상 모든 게 혁신이라 할 만하지만 혁신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아니 혁신이 그랬으면 하고 바라는 희망사항은 혁신이 새롭고 빠르고 놀랍다는 것이다.

혁신은 새롭다? 연구소의 기술 개발이나 기업의 제품·서비스 개발이나 혁신은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드는 일로 여겨진다. 새롭지 않은 것은 혁신적이지 않은 것처럼. 이들 기술과 제품 및 서비스를 이용하는 우리 일상을 돌아보면 무수한 반복의 연속이다. 하루를 시작하면 거의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거의 비슷한 시간, 거의 비슷한 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한다. 스타벅스는 커피를 발명한 게 아니라 단지 커피를 다르게 마시는 경험을 제공했을 뿐이다.

혁신은 빠르다? 미국 대학에 오래 재직했던 선배가 한국에서 혁신 관련 학회에서 기조 강연을 하게 되었는데 자꾸 ‘이노베이션(innovation)’이라는 말을 영어 그대로 썼다. 나도 미국에서 가르치다 한국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영어 단어를 섞어 써서 강의 평가 때 지적받은 적이 있다. 그래서 강연 후 만찬에서 선배에게 영어를 섞어 쓰는 게 거부감을 줄 수 있다고 조심스레 얘기하니 설명인즉 한국에서는 혁신 하면 워낙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혁명적 변화라는 느낌을 주어서 일부러 이노베이션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혁신은 아주 오랜 기간 서서히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혁신은 놀랍다? ‘경영학의 아인슈타인’이라 불리는 하버드 경영대 교수 클레이턴 크리스텐슨은 파괴적 혁신 개념의 주창자로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파괴적 혁신은 파괴적이지 않다. 정확히 말해 파괴적 혁신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기술이 아니다. 와해적 혹은 돌파적이라고 번역되는 브레이크스루(breakthrough) 기술이 아니라 부(富)나 지식, 취향 등 여러 이유로 사회의 특정한 그룹이 향유하던 기술이 퍼져 모두가 두루 쓰게 되는 기술의 민주화라고 표현한다. 그가 대표적으로 드는 예가 초창기 고가의 구성과 복잡한 조작 메커니즘으로 얼리 어답터만 쓰다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개인용 컴퓨터다.

요컨대 새롭고 빠르고 놀라운 혁신은 드물고 어렵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그런 혁신은 기존 행태, 습관, 규칙, 제도를 원점에 두고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예전에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유명한 재벌 총수의 주문에 대해, 가장 바꾸고 싶지만 바꾸기 어려운 게 바로 그 ‘마누라와 자식’이라는 대꾸가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그 ‘마누라와 자식’은 바꾸고 말고 할 게 아니라 보듬고 같이 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즉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삶의 조건은 내팽개칠 수도 없고 내팽개쳐서도 안 된다. 젊을 적에는 ‘마누라와 자식’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 모든 기적이 가능할 듯 보였으나 ‘마누라와 자식’이 생긴 후에는 세상에 기적이 과연 있을까 싶다.

정치권에서 정파를 초월해 혁신을 외치고, 확연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경제 정책도 모두 혁신으로 포장되고, 평가를 위해 부랴부랴 등록한 특허가 혁신 성과로 홍보되고, 그저 좀 괜찮은 슈퍼마켓 진열 상품들이 혁신적 제품으로 광고되면서 나만 혁신 피로감을 느끼는 것 같진 않다. 그런 혁신은 단호히 반대한다.
 
김소영 객원논설위원·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장
#혁신#이노베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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