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서지문]다시 ‘전관예우’ 문제를 생각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6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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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나는 안대희 전 대법관이 5개월 동안에 수임료로 16억 원을 벌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가 대리인이 되어 승소하게 해준 의뢰인의 소송 상대방이 흘린 피눈물이 몇 말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악랄한 사기나 횡령 또는 명예훼손을 당하고 주체할 수 없는 배신감과 분노의 설욕을 법에 호소했다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패소를 당해서 하늘을 원망하며 화병에 폐인이 된 사람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아마도 전직 고위 법관들이 수임하는 대형 사건은 개인 간의 원한과 배신감, 증오에 얽힌 극도의 감정적인 소송보다는 대기업 대 대기업의, 또는 대기업(이나 대기업주) 대 정부기관의 소송으로, 관련된 개인이 패소로 인해 입는 타격은 직접적이기보다 간접적인 경우가 일반적일 것 같다. 또 조세포탈 사건이라면 그의 소송 대리인의 승소로 손해를 보는 쪽이 개인이 아니라 국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개인의 안녕이 걸린 집단 소송 케이스도 있을 수 있겠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거액의 수임료를 지불할 수 있는 쪽이 반드시 정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일 수 있다. 그러나 전직 고위 법관을 대리인으로 영입할 경우 입지가 약한 의뢰인도 소송에서 유리해진다는 것이 이유 있는 상식이라고 본다면 전직 고위 법관의 수임으로 인해 부당하게 불리해지는 개인, 기업, 공공기관이 있다는 말이고 그러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로 인해 힘없는 개인들이 생계에 타격을 입거나 사업체가 크게 불리하게 되거나 국민의 세 부담이 증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고액 소송과는 상관이 없는 서민들은 그런 케이스의 존재만으로도 법에 대한 신뢰와 사회정의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다.

안 전 대법관의 총리 후보 사퇴는 참으로 가슴 아팠다. 우리 시대의 올곧은 법관이었던 인물을 총리 후보로 되돌릴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대법관 퇴임 후 5년간 수임료 60억 원을 챙기고도 당당하게 6년을 신성해야 할 사법부의 수장으로 군림했던 이용훈 전 대법원장 등 ‘전관예우’ 관행을 이용해서 수억, 수십억 원씩 수임료를 챙기고도 청문회에서 약간의 시달림 끝에 고위공직자의 영화를 누렸던 다른 인사들을 생각한다면 안 전 후보는 매우 억울하고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전관예우 관행이 옳지 못한 현실에서 그의 낙마가 부당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전관예우라는 것이 마치 퇴임 법관들에게 재직 중 판검사로서의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지는 보너스인 양 회자되기도 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전관예우 수임료는 국고에서 나오는 보상금이 아니다. 사업상 이해관계 때문에, 또는 엄중한 죗값을 면제받기 위해서 서민들에게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수임료를 지급하고 전직 고위 법관을 소송 대리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지급하는 것이다.

대체 ‘법’이란 무엇인가? 법은 인간이 모여서 이룬 사회에서 일부 악덕 구성원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해 도덕이 무너지고 질서가 파괴될 때 힘없는 피해자가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그 사회의 공식이 될 때는 사람들은 마음이 공허해지고 의지할 데가 없어서 우왕좌왕하게 되고, 도덕이나 공민의식보다 기회주의, 한탕주의가 횡행하게 된다. 지금 우리나라의 법은 나라의 기강을 굳건히 하는 법, 힘없는 자를 보호하는 법이 아니고 가진 자에게 유리한 법, 법관이 재단하는 법이 되고 있다.

법 정의의 확립은 국민의 정신건강, 시민정신의 초석이다. 전관예우는 사법 정의 몰락의 징표이므로 철저히 차단되어야 한다.

서지문 고려대 명예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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