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김병종/성큼 다가온 지방문화시대

  • 입력 2001년 10월 28일 19시 05분


나라 밖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절실하게 느껴지는 점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같이 자연환경이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나라도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집 짓고 간판 달고 하는 인위적인 환경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해서 문제이지 자연환경만큼은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기차라도 타고 다니다 보면 들이며 강이 그림처럼 펼쳐져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되곤 한다.

그런데 수도권의 인구가 날로 과밀화 해 숨막힐 지경이 된 지 오래지만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으로만 귀거래사를 되뇔 뿐 누구도 선뜻 지방으로 거주지를 옮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직장에 얽매이고 자녀들의 학업에 발이 묶여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까지도 이런 저런 이유로 막상 서울을 떠나는 일은 쉽지 않다.

문화적 프리미엄이 지나치게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도 그 쉽지 않은 이유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가 고학력 사회로 접어든 지 오래여서 이제 먹고사는 문제는 웬만큼 해결되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화적 욕구가 함께 충족되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다.

음악당과 미술관, 연극 공연장 같은 문화시설들이 서울에 몰려 있다보니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보고 싶은 공연이나 전시회도 모처럼 서울나들이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의료환경 같은 것은 이제 서울과 지방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유독 서울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만은 아직도 잘 메워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지방 이곳 저곳을 여행하면서 나는 이제 지방에서도 조만간 서울 못지 않은 독특한 문화적 환경을 다질 수 있겠구나 하는 가능성을 발견하고는 흐뭇하게 생각했다.

일례로 경남 통영에 갔을 때 나는 서울서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와 예술의 향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곳이야 워낙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한 도시이긴 하지만 도시 전체가 예술적 분위기로 가득했다.

눈부신 통영 앞 다도해를 바라보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고 울었던 청마 유치환 시인의 문학관을 둘러보고 작곡가 윤이상거리를 걸어 세계적 수준의 조각공원에 오르니, 마치 남부 유럽의 한 유서 깊은 도시에라도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바닷물 철썩이는 전남 진도의 수백석의 객석을 갖춘 문화회관에서 서울서는 보기 어려운 씻김굿과 진도창 공연을 관람할 때에도, 억센 지리산 줄기 아래의 전북 남원 국악원에서 지리산의 울음을 닮은 동편제 판소리 가락을 들을 때에도 그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호반의 도시 강원 춘천에서 해마다 열리는 국제마임페스티벌도 서울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명공연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여름이면 프랑스의 아비뇽연극제처럼 경남 거창에서 열리는 대규모 세계 연극제에 참가해 각국의 연극을 보고 느끼는 감동 또한 유별나다.

이런 좋은 공연들을 보기 위해 소리 소문 없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니 이 또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들이 바야흐로 문화예술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지방문화의 시대도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얼마 전 충남 금산군에서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건축가 빌 모트에게 설계를 의뢰해 문화를 주제로 한 다목적 군민회관의 공사를 시작했다. 그 곳 문예회관 안에는 800여석 규모의 대극장과 전시실이 들어서게 된다.

언젠가 만난 금산 군수가 “머지 않아 영국 로열발레나 피카소 특별전 같은 이름 있는 문화행사를 금산군에서 유치할 터이니 초청장을 보내면 꼭 와 달라”고 당부했던 말이 떠오르곤 한다. 그 꿈 같은 말이 현실로 다가올 날을 가슴 설레며 기다려본다.

이렇게 되면 귀거래사를 읊으며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날 것이다. 서울의 인구집중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지 모를 일이다.

김병종(화가·서울대 교수·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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