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서지문/인권 모르는 문명국은 없다

  • 입력 2001년 10월 14일 18시 55분


‘유럽 사람들은 폐허(廢墟)를 문화의 기준으로 삼고 미국인들은 배관(配管)을 문화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말이 있다.

여행을 좀 다녀 본 사람이라면 이탈리아에서 웅장한 로마 유적과 찬란한 르네상스 건축, 미술품들을 보고 경탄하다가 기념품 가게나 음식점에서 바가지를 쓰거나 호텔에서 욕실의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형편없는 후진국이라고 생각했던 모순을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은 찬란한 문화유적이 많은 나라에서 흔히 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에 가면 볼만한 문화유적은 많지 않지만 상하수도 시설이나 냉난방 시설, 전력공급망, 전화망 같은 것이 너무 잘 돼 있고 고장도 거의 나지 않기 때문에 ‘선진국’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난다.

문명국가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각자의 기준이 있겠지만 나는 현대에서는 인권이 절대적인 기준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상류층만 사람답게 살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당하고 법률적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나라는 아무리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졌다고 해도 문명국이 못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인권상황은 자연환경처럼 나라에 따라 애초부터 좋았거나 나빴던 것이 아니다. 인권은 어느 나라나 식자층과 민중이 함께 수백년 동안 치열한 투쟁으로 쟁취하고 확립한 것이다. 인권이 확립된 나라에서는 억울한 삶과 죽음이 적고, 개인의 능력이 최대한 발휘될 수 있어서 사회발전의 가능성이 많다.

물론, 아무리 인권이 보장된 나라에서도 인권을 짓밟는 일은 일어난다. 그러나 그런 일이 드러나면 철저한 수사가 이뤄져 가해자가 처벌을 받고, 소수민족이나 불이익집단에 대한 권리침해일 경우 부당성에 대한 여론이 조성되고, 공권력이 해외에서 수십년 전에 저지른 인권침해도 파헤쳐서 책임을 규명하는 나라라야 진정으로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다.

인권이 보장된 나라에서는 여권도 신장돼 있다. 그래서 여성이 복면 같은 베일에 갇혀 문맹의 암흑 속에서 살아가지 않고, 위대한 학자 예술가 사업가의 자질을 타고 난 여성이 바느질을 못한다고 매를 맞거나 밥을 태웠다고 쫓겨나는 일이 없고,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하면 친정식구들이 기어코 찾아내 40년 후에라도 ‘명예살인’을 하는 따위의 일이 없다.

또한 인권이 보장된 나라에서는 장애인이 비장애인처럼 살 수 있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받는다. 장애인을 집안의 수치로 생각해서 골방에 가둬 놓는 일은 인권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확실한 문명국에서는 법질서도 확립돼 있어, 권력형 비리가 철저히 규명된다. 그래서 권력자라도 부정 불법한 행위를 저지르면 준엄한 심판을 받고, 권력에 줄이 닿아 있지 않은 사람이 생업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다.

부실공사나 난개발 같은 사람의 안전과 건강을 위협하는 일들도 감히 행해지지 못한다. 선진국에서 배관(配管)이 제대로 되는 것은 기술이 발달해서만이 아니고 사람의 편리와 안전과 직결된 것이라는 시공자의 의식 때문이다. 또 제품을 안심하고 소비할 수 있는 곳이 선진국이다. 생산지 표시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는 비싼 과일상자가 먹을 수 없는 과일로 채워져 있거나, 유명백화점의 수십만원짜리 선물세트에 찌꺼기 고기를 갈비에 붙이거나 가짜굴비를 넣어서 배달해도 제재를 받지 않는 나라는 국민 의식의 후진국이다.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박탈하는 일도 자행되지 않는다. 치어를 잡아서 바다고기의 씨를 말리는 불법어로 행위를 하다 적발된 사람이 ‘이건 먹고살기 위해 하는 거니까 도둑질이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나라는 문명국이 아니다.

최근의 사태 때문에 ‘문명 충돌론’도 나오고 하면서 이슬람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좌파세력은 웬일인지 폐쇄적이고 억압적이고 가난한 나라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다. 물론, 선진국에도 여러 병폐와 고민이 있고, 국가적인 과오도 많다. 그리고 후진국일수록 인정이 풍부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진사회에 대한 동정에서 그 나라들의 후진성을 다 가난 탓으로, 그리고 그들의 가난을 다 선진국의 탓으로 돌린다면 사회의 제반 부조리의 척결도 그만큼 늦춰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지문(고려대 교수·영문학·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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