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개조한 생활편의시설… ‘지역 공동체’ 꿈이 익어간다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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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거복지를 넘어 공간복지로] <1> 프랑스 파리 ‘레그랑부아쟁’

매달 열리는 장터에 주민들 북적 프랑스 파리 14구 ‘레그랑부아쟁’에서 매달 열리는 장터의 모습. 옛 
공공병원에 들어선 레그랑부아쟁은 주택, 카페, 공연장, 상점, 스타트업 사무실 등이 들어선 복합시설이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찾아 문화, 복지 혜택을 누린다. 레그랑부아쟁은 방치됐던 공공시설을 주민 편의시설로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레그랑부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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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열리는 장터에 주민들 북적 프랑스 파리 14구 ‘레그랑부아쟁’에서 매달 열리는 장터의 모습. 옛 공공병원에 들어선 레그랑부아쟁은 주택, 카페, 공연장, 상점, 스타트업 사무실 등이 들어선 복합시설이다. 인근 주민들은 이곳을 찾아 문화, 복지 혜택을 누린다. 레그랑부아쟁은 방치됐던 공공시설을 주민 편의시설로 바꾼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레그랑부아쟁 제공
《도서관, 공연장, 커뮤니티 공간, 체육시설, 유아원, 빨래방, 노인정…. 공간복지는 집에서 도보 10분 이내에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춰 주민들이 공간에서도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현재 지역마다 공간복지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어서 공간복지의 개념을 확산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공공시설 재건축, 공공주택 공유 공간 재배치 등으로 공공시설의 활용도를 높이고 공간복지 혜택을 늘리려는 노력도 나오고 있다. 생활 밀착형 공간을 만들어 공간복지를 구현한 국내외 모범 사례를 찾았다.》


프랑스 파리14구 레그랑부아쟁(Les Grands Voisins). 레그랑부아쟁은 프랑스어로 ‘좋은 이웃’이란 뜻으로 주택, 카페, 공연장, 상점, 스타트업 사무실 등이 들어선 복합시설이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만난 50대 여성 실비 파예스크리브 씨는 개성 있는 옷과 유기농 빵을 구입하려고 왔다. 물건 가격은 인근 가게의 절반 수준이다. 파예스크리브 씨는 “젊은이들이 많아 늘 활력이 넘친다. 이곳만의 묘한 매력이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은 약혼자와 함께 공연이 수시로 열리는 바를 찾는다.

레그랑부아쟁은 공공병원인 생뱅상드폴병원이 사용하던 건물에 들어섰다. 생뱅상드폴병원은 환자가 줄어들자 문을 닫아야만 했다. 2013년 파리14구는 방치된 건물을 시민단체 오로르(Aurore)에 위탁해 실업자 지원시설 등 복지시설로 만들었다. 2015년에는 식당, 장터, 스타트업 사무실 등도 입주했다. 주민 편의시설이 갖춰지자 방문객이 늘기 시작했다. 도보 5분 이내에 주택이 밀집해 있다. 마리 길게 레그랑부아쟁 책임자는 “주민 편의시설은 실질적인 혜택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요소가 중요하다”며 “그런 요소를 갖추고 주거지와 가까워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레그랑부아쟁은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체육시설, 독서실, 노인정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춰 주민들이 복지 혜택을 누려야 한다는 ‘공간복지’의 개념을 충실히 반영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하지만 레그랑부아쟁이 처음부터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던 것은 아니다. 초창기 주민들은 이곳에 들어선 취약계층 지원시설에 반대했다. 시설 운영을 맡은 오로르 등 시민단체들은 주민들을 직접 만나 앞으로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실제 카페, 공연장 등이 들어서며 실업자 지원시설에 불과했던 공간은 청년들이 즐겨 찾는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길게 책임자는 “주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해 공간을 구성했다.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시설이 들어서자 반대 여론도 바뀌었다”고 말했다.

레그랑부아쟁에서는 매달 흥미로운 장터가 열린다. 이 장터에서는 입주 창업 기업과 예술가들이 만든 제품을 팔고 세계 각국의 음식도 소개한다. 화폐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물물 교환으로만 거래해야 하는 행사도 있다. 지하철 이용권을 가져와서 필요한 물건과 바꿔갈 수도 있다. 그렇게 모인 이용권은 실업자 등 취약계층에 지급된다. 주민들은 이런 행사를 “즐거운 놀이이자 동시에 기부”라고 말했다. 시설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기부가 이어졌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 두 잔 값을 계산하고 다른 사람이 마실 수 있게 배려하는 ‘서스펜디드 커피’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레그랑부아쟁에 입주한 기업과 예술가들은 건물 벽면을 꾸미는 등 재능기부를 약속해야 한다. 또 장터가 열리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 대신 임차료를 시세의 절반 정도만 내고 필요한 공간을 얻는다. 유기농 초콜릿을 만드는 몽자르댕쇼콜라테(Mon jardin chocolat´e)의 카린 데르 대표는 “입주 기업들과 공동으로 납품 계약을 맺는 등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시설에서 소개한 구직 청년, 실업자를 채용할 때도 있다. 나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한 입주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유학생 A 씨는 “창업 초창기에는 만든 제품의 상품성을 평가해 봐야 한다. 여기에서는 옷가게, 장터 등을 통해 수시로 소비자와 접하며 제품의 반응을 현장에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레그랑부아쟁은 현재 시험대에 놓였다. 파리시는 내년 6월부터 이곳에 임대주택 단지를 지을 계획이다. 다만 파리시는 주민들의 반응이 뜨거웠던 옷가게, 공연장 등은 새로 짓는 주택단지에 입주시키기로 했다. 현지에서 만난 주민들은 “집 가까운 곳에서 여러 편의시설을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공간을 매개로 주민과 청년, 창업자들이 공생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입을 모았다.

파리=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공간복지#프랑스 파리#레그랑부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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