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무가내 우회전… 위험천만 ‘교통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1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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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 줄이자/시즌2]<16> 보행자 위협하는 교차로시설

▲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교통섬과 인도 사이 횡단보도를 차량 한 대가 지나가고 있다. 한 보행자는 아직 횡단보도를 채 건너지도 않았고 다른 보행자들은 기다리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교통섬과 인도 사이 횡단보도를 차량 한 대가 지나가고 있다. 한 보행자는 아직 횡단보도를 채 건너지도 않았고 다른 보행자들은 기다리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5m도 채 되지 않는 거리였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우회전한 시내버스가 교통섬을 향해 횡단보도를 건너던 여성 두 명에게 ‘돌진’했다. 버스는 원심력 탓에 왼쪽으로 기운 채 곡선주로를 달렸다. 깜짝 놀란 여성들은 보도로 황급히 되돌아갔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곳에선 같은 장면을 한 시간에 서너 차례 볼 수 있다.

교통섬은 교차로에서 흔히 보이는 교통안전시설이다. 보행자가 여기서 신호를 기다린다. 교통섬과 인도 사이는 명백한 횡단보도다. 그런데 현실에선 횡단보도 대우를 받지 못한다. 보행자보다 차량이 우선이다.

○ 보행자 위협하는 교통섬

서울 중구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사거리 상황도 비슷하다. 이곳은 서울에서 버스 통행량이 가장 많다. 광화문이나 서울역에서 강남과 경기 남부를 오가는 버스 대부분이 이곳을 지난다. 동서 방향으로 왕복 7차로, 남북 방향으로 왕복 8차로다. 차량 통행은 편리하다. 하지만 보행자는 위험천만이다.

1일 오후 1시경 을지로입구역 7, 8번 출구 앞. 약 1시간 동안 어떤 차량도 교통섬과 보도 사이 횡단보도 앞에서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보도에 사람이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두 살배기 아들이 탄 유모차를 밀던 김하영 씨(31·여)는 우회전 차로를 쳐다만 봤다. 김 씨는 “결국 보행자가 목숨 걸고 차량 행렬을 뚫고 건너야 한다”고 말했다.

교통섬은 1988년부터 교통체계 개선 명목으로 설치됐다. 그러나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 지난해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보행자의 안전 확보를 위한 신호교차로 개선방안’에 따르면 세계 주요 대도시 간선도로를 비교한 결과 서울은 교차로 한 곳당 교통섬이 2.6개가 있다. 도쿄(1.3개)나 런던(1.2개)의 2배다.

김원호 서울연구원 교통시스템연구실장은 “연구 결과 교통섬은 보행자 통행량이 시간당 800명 이하, 우회전 교통량이 시간당 260대 이상일 때만 효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며 “교통섬이 필요한 교차로도 보행자 안전을 위한 설치기준 마련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빨간불 우회전은 불법? 합법?

교차로에 빨간불이 켜졌을 때(횡단보도는 녹색불) 우회전(RTOR·Right Turn On Red)을 허용하는 것도 보행자보다는 차량 소통에 초점을 맞춘 교통체계다. 세계에서 RTOR를 허용하는 나라는 한국과 미국, 캐나다 정도다. 국제기준은 적신호 우회전을 금지한다. 1968년 도로 표지와 교통신호에 관한 빈 협약은 포괄적으로 빨간불일 때 차량이 가지 못하게 규정했다. 현재 유럽 33개국 등 56개국이 이 협약을 따르며 대부분 다른 국가도 이를 준용한다.

미국은 보행자 보호 장치를 여럿 마련해 놓았다. 어린이보호구역이나 사고 발생 구역은 예외적으로 빨간불에도 우회전을 금지한다. 우회전 전용 신호등도 설치한다. 무엇보다 우회전이 가능한 곳도 횡단보도 앞에서는 사람이 있든 없든 무조건 차량이 멈춰야 한다.

한국은 적신호 우회전 상황에서 일시정지 의무가 없다. 관련된 도로교통법 규정도 애매하다. 경찰청에 따르면 우회전 때 보행자가 횡단보도를 건너면 정지하고, 보행자가 없거나 충분히 지나간 후엔 통과해도 단속되지 않는다. 반면 2011년 대법원은 보행신호에서 차량 우회전은 불법이라고 판시했다.

임채홍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우회전 사고가 났을 때 적용하는 법규도 중과실인 신호 위반과 일반과실에 속하는 안전운전 의무 위반 등 상황에 따라 제각각”이라며 “적신호 때는 우회전 금지라는 명확한 기준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일단 우회전 후 횡단보도에서는 무조건 일시정지 하도록 도로교통법을 고치고 우회전 때 운전자 시야를 가리는 교통시설물도 점차 옮기겠다”고 말했다.

정성택 neone@donga.com·서형석 기자
#우회전#교통사고#교통섬#보행자#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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