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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내 고향 서울

“하천 옆 아낙들 팔던 양념 가래떡이 신당동 떡볶이 원조”

입력 2018-04-06 03:00업데이트 2018-04-06 0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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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서울]<4>여든살 진기홍 씨의 ‘신당동 삶 72년’
3일 오후 진기홍 씨(위쪽 사진 오른쪽)가 자신이 72년을 살아온 서울 중구 신당동의 어제와 오늘을 얘기하고 있다. 1966년 복개된 신당천 위에 들어선 신당동 떡볶이 타운(아래쪽)과 조선시대 한양 도성 안에서 시신이 나가던 광희문.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이사 온 지 석 달도 안 돼 물난리를 겪었다. 광복 이듬해 8세이던 진기홍 씨(80)는 서울 종로구에서 중구 신당동(당시 성동구)으로 왔다. “사실 집이라고 할 수도 없긴 했어.” 아버지가 천변에 판자로 올린 집이었다. 남산에서 청계천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비슷한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날일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장마에 집 안까지 물이 들어찼다. 하천 건너편은 높이 5∼6m 석축이 있어 끄떡없었다. 아버지는 건너편에 다시 집을 지었다.

○ 양념 묻혀 팔던 가래떡, 떡볶이

축대 끄트머리 집에서 배추밭과 무밭을 지나면 문화촌이 있었다. 진 씨는 “일본인이나 부자들이 살던 문화촌엔 한옥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한옥은 실은 1930년대 일식과 서양식, 한식을 절충한 이른바 문화주택이다. 빈민촌과 화장터가 있던 동화동(당시 신당6동)과 장충동 일부는 일제강점기 문화주택촌이었다. 조선총독부 하급 관리나 중산층에 1921년, 1934년, 1938년 등 세 차례 분양됐다. 빈민촌과 부촌이 공존한 배경이다. 당시 조성된 문화주택 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던 집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시민에게 개방된다.

신당천 혹은 무당천이라 불리던 하천. “돌다리 옆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번데기며 달고나, 가래떡을 팔았어.” 이것저것 양념을 묻혀 팔던 가래떡이 신당동 트레이드마크가 된 ‘신당동 떡볶이’의 원조다. 1951년 1·4후퇴 때 피란 갔다 4년 만에 돌아와 보니 양념 묻혀 팔던 가래떡은 극장 옆 포장마차에서 파는 떡볶이가 됐다.

1966년 청계천 복개 사업과 함께 신당천이 덮여 아스팔트가 깔렸다. 동화극장을 중심으로 1970년대부터 프라이팬에 떡, 채소, 고추장을 담아 불에 끓여 먹는 떡볶이집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현재 ‘신당동 떡볶이 타운’ 간판이 서 있는 그 길 아래로 하천이 흘렀다. 진 씨는 “1인분에 100원쯤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매운 걸 못 먹어서 떡볶이를 먹진 않았다”며 웃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떡볶이 가게만 50개를 넘었다.

6·25전쟁으로 학교 다닐 때를 놓친 그는 18세부터 양복기술을 배웠다. 양복점이 즐비해지기 시작하던 명동까지 전차를 타고 출퇴근했다. 전차 정류장이 있던 을지로6가 로터리를 가려면 광희문을 지나야 했다.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렸다.

○ 조선시대부터 신당동

“광희문 때문에 동네 이름이 신당동이 된 거지.”

광희문은 조선시대 한양 사대문 안에서 죽은 시신들이 나가던 문이었다. 자연스럽게 문 밖 주변에 묘지가 생겼고 무당집(신당·神堂)이 많아졌다. 그래서 신당동(神堂洞)이 됐다. 1894년 갑오개혁 때 미신을 혁파한다며 ‘귀신 신(神)’ 자를 ‘새 신(新)’ 자로 바꿨다.

점집은 1980년대까지도 많았다. “장마 때나 한참 개발하려고 땅을 파면 유골이 많이 나왔는데 그럼 굿을 하느라 무당이 오고….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나둘씩 사라지더라고.”

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 3번 출구 자리에 있던 광희문은 1975년 퇴계로를 확장하면서 원래 자리에서 15m 남쪽으로 옮겼다. 그 참에 허물어진 성루를 복원했다. 진 씨는 “예전엔 광희문 앞이 장터였다. 이제는 그 앞에서 가끔 관광객들 사진을 찍어준다”고 말했다. 올 1월 중구는 동대문 의류 상가를 찾는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광희문부터 지하철 5호선 청구역까지를 보행친화거리로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광희문으로 향하던 뒷골목에서 드르륵 하는 각종 공구 소리가 요란하다. “요 앞 ‘충남대장간’에서 나는 소리야.” 신당동에는 조선시대 무쇠솥과 농기구를 만들어 나라에 바치던 대장간들이 모인 ‘무쇠막 고개’가 있었다. 서울에서 대장간이 가장 많던 동네였다. 퇴계로에는 1970년대까지 대장간 100여 개가 있었다. 1980년대 산업화를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지만 지금도 두어 집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진 씨가 9세 때부터 살던 집터에는 벽돌로 지은 건물 일부가 남았다. “동네 이름이 조선시대 때부터 그대로여서인지 이 동네는 많이 변하면서도 꼭 흔적이 남더라고.” 그가 귀퉁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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