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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내 고향 서울

30년전 신혼집 앞 최루탄 휙휙… 고시촌엔 이제 싱글족 북적

입력 2018-03-05 03:00업데이트 2018-03-19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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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서울]<2> 황영숙 씨의 33년 삶터 대학동(신림9동)
황영숙 씨가 서울 관악구 대학동 삼성초등학교 운동장에 서 있다. 28년 전 황 씨가 아들을 안고 사진을 찍은 바로 그곳이다. 연립주택과 야트막한 산이 있던 학교 뒤편에는 현재 고층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33년 전 황영숙 씨(56·여) 신혼집 앞으로 최루탄과 돌이 날아다녔다. 학교 입구를 막은 전경들과 마주한 대학생들은 인도에서 떼어내 부순 보도블록 조각을 쥐고 있었다. 구청에서 보도블록을 걷고 시멘트를 깔았지만 매운 가루가 공기에 가득했다. 갓난 아들이 최루탄 소리에 깰까 봐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집에서 서울대 정문까지 걸어서 5분 걸렸다. 1985년 스물네 살 늦가을, 황 씨는 고향 광주에서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서울 관악구 신림9동. 지금의 대학동이다.

○ 허허벌판에서 하숙촌으로

“남편 어릴 때 ‘녹두거리’ 쪽은 허허벌판이었대요.”

1960, 70년대 초반 관악산 끝자락 신림9동 일대에는 용산 해방촌이나 청계천 판자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터전을 꾸렸다. 무허가 판잣집과 관악골프장이 공존하던 이곳으로 1975년 동숭동과 공릉동의 서울대 문리대, 이공대가 옮겨 왔다.

신림9동에서 가장 먼저 식당과 주점이 들어섰던 화랑거리에 학생들이 밀려들었다. 화랑거리는 신림9동 앞을 흐르는 도림천의 두 번째 다리 화랑교 앞에서 시작된다. 폭 6m의 소로(小路). 이 거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지방 학생을 위한 하숙집이 하나둘씩 늘었다. 황 씨가 올라왔을 때는 층마다 방 서너 개씩 하숙을 치는 2층집이 줄지어 있었다.

서울대생들은 화랑거리를 녹두거리라고 불렀다. 황 씨는 “1980년대 초 거리 초입에 녹두빈대떡을 팔던 ‘녹두집’이 있었는데 그래서 녹두거리가 됐다고 한다”고 했다.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억압적 학원정책에 신음하던 학생들은 녹두장군 전봉준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시위를 마치고 최루탄 냄새 범벅인 학생들은 이 거리 주점에 모여 뒤풀이를 했다.

황 씨는 녹두거리를 조금 지나면 있던 화랑시장을 매일 다녔다. 녹두거리는 대략 지금의 신림로11길과 대학5길이 만나는 지점의 ‘왕약국’까지다. 미세하던 오르막이 왕약국을 지나면 조금씩 가팔라지고 그 양옆 상점이나 좌판들이 시장을 이뤘다. 이곳에서 산 찬거리는 신림9동 주민 식탁과 하숙집 아침상에 밥반찬이 돼서 올랐다.

○ 하숙촌에서 고시촌으로

2014년 서울 관악구 삼성산에서 바라본 고시촌 전경. 고시생이 떠난 생활공간에 이제는 사회초년생과 신혼부부들이 살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90년대 들어 신림9동은 고시촌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옛 소련의 붕괴와 다중주택건축가능구역 지정이 이를 불렀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허허해진 학생들은 사법 외무 행정고시로 눈을 돌렸다. 여기에 서울시는 1990년 3월 신림9동 18만 m²(약 5만5000평)를 다중주택건축가능구역으로 지정했다. 서울 최초로 3층 이하 건물에 방 20개까지 들이는 기숙사형 주택을 지을 수 있게 됐다.

다세대주택 위주이던 동네는 두 갈래로 재건축 붐이 일었다. 아파트, 혹은 1인 가구용 건물이 대거 들어섰다.

황 씨가 살던 3층짜리 연립주택 ‘서림맨션’도 1994년 허물고 아파트를 지었다. 아파트 값이 버거운 젊은 부부들은 신림9동을 떠났다. 주택을 원룸 건물로 새로 올린 이웃도 많았다. “그때 원룸으로 바꾼 사람들은 노후 대비 확실히 되겠다고 부러움을 많이 샀어요.”

유명 고시학원 이름이 오르내리고 다른 대학가와 지방에서 올라온 고시생 수만 명이 몰렸다. 고시생이 늘면서 딸이 다녔던 삼성초등학교는 1500명이던 전교생이 약 400명으로 줄기도 했다. ‘그날이 오면’ 같은 인문사회과학서적은 쇠락해 갔다. 황 씨가 초등학생 아들, 딸에게 주말이면 돈 1만 원을 쥐여 주고 ‘놀다’ 오게 했던 ‘광장서적’은 고시서적을 더 많이 팔았다.

○ 고시촌에는 신혼부부들이

2000년대 들어 슬며시 화랑시장은 사라졌다. 대형 슈퍼마켓과 화장품 가게, 코인노래방이 들어섰다. 이름을 바꾼 정육점만 남았다. 산비탈 고시원들이 아랫마을까지 ‘점령’하면서다. “다들 혼자 사는데…. 장 볼 사람이 없어진 거지.”

1995년 둘째까지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 가계에 보탬이 될까 하여 콜센터 직장을 가진 황 씨는 2007년 퇴직한 뒤에야 동네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10여 년째 동명(洞名)을 바꾸자는 목소리가 높았다. ‘신림동 달동네’ 이미지를 벗으려고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많았다. ‘집값 싸고 대학가라 안심하고 아이들 키운 동네인데 부끄러울 건 뭐람’ 하는 생각도 들었다. 2008년 신림9동은 대학동이 됐다.

그해 로스쿨이 생겼다. 사시는 사라지게 됐다. 빈방이 늘어가며 고시촌은 쭈그러들었다. 문화센터에서 만나는 ‘노후 대비 잘했다’던 이웃들은 “(고시원) 방 열 개 가운데 서너 개는 빈다”며 울상이었다.

그러나 죽으라는 법은 없다. 빈자리는 강남에 가까우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곳을 찾는 사회초년생이나 신혼부부가 채운다.

광장서적은 2013년 문을 닫았다. 그래도 군데군데 헌책방이 남아 있다. 고시에 합격한 사람도, 포기한 사람도 책은 팔고 나간다.

대학동의 많은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고시가 끝나고, 자리를 잡으면 이곳을 떠났다. 관악구 마을관광해설사인 황 씨는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어쩌면 대학도, 고시도 상관없었으니까 이렇게 남아 있는 건지도 몰라.” 멋쩍게 그가 웃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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