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주의 날飛] 실패한 ‘이코노미 좌석 넓히기’

이원주기자 입력 2018-07-16 17:58수정 2018-07-1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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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飛’는 최근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공급이 차질을 빚었던 사안과 관련해 유명을 달리한 기내식 납품업체 협력사 대표의 명복을 빕니다.

약 1년 전쯤 ‘날飛’가 전해드렸던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항공사가 비행기 이코노미석 좌석 간격을 계속해서 줄이지 못하도록 해 달라는 미국의 비영리단체 ‘플라이어스 라이트(Flyers Rights)’의 청원을 미 법원이 받아들였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우리나라 항공사 이코노미석 좌석 간격은 미국에 비해서는 넓지만 결코 넉넉한 공간은 아닙니다. 당시 ‘날飛’ 보도에 많은 독자들께서 댓글을 달아주셨던 이유도 조금이나마 쾌적한 여행을 바랐기 때문이었겠지요.

▷관련기사: [이원주의 날飛]비좁은 비행기 이코노미석의 비밀

하지만 오늘 전해드릴 소식은 소비자 입장에선 그리 반갑지 않은 소식입니다. 미 법원의 결정에 따라 연구와 실험을 한 미 연방 항공청(FAA)이 최근 결과 보고서를 내고 “좌석 간격과 안전에는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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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이코노미 좌석. 동아일보DB

‘플라이어스 라이트’가 미국 법원에 이런 청원을 할 때 내든 명분은 안전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승객 체형은 계속 커지는데, 좌석 간격은 오히려 좁아지다 보니 비행기에서 탈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좌석 간격 때문에 빠르게 탈출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법원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였고, FAA에 승객 탈출에 지장이 없는 좌석 간격을 지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FAA가 “좌석 간격과 안전은 연관성이 없다”고 결론을 낸 후 ‘플라이어스 라이트’에 회신한 문건. 자료: FAA

FAA는 에어버스(유럽), 보잉(미국), 엠브라에르(브라질) 등 항공기 제작사에 승객 탈출 시뮬레이션을 의뢰했습니다. 좌석 간격이 승객 탈출 시간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각 회사의 탈출 시뮬레이션에 FAA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에어버스社가 FAA 의뢰를 받아 실시한 승객 탈출 실험 영상 캡처. 이 회사는 좌석 간격을 28~30인치로 다양하게 설정하고 실험했습니다. 자료: 에어버스·FAA

여기서 잠깐, 이해를 돕기 위해 FAA가 정한 비상시 탈출 규정을 소개해드리고 넘어가겠습니다. 승객이 44명 이상 탈 수 있는 항공기는 설계 단계부터 승객 탈출 절차를 만족하도록 만들어져야 합니다. 실험 조건은 이렇습니다.

△지상 탈출을 가정할 것(비행기가 물 위에 내리는 조건이 아님)
△해당 기종이 태울 수 있는 최대 인원을 가정할 것(즉, 기내 전체를 이코노미 좌석으로 빽빽하게 채울 것)
△객실은 완전히 어두운 상태에서 비상등과 비상구 안내등만 켜질 것
△탈출구 중 절반 이하만 사용 가능한 상태를 가정할 것
△탈출 절차(시뮬레이션)에 참여하는 가상 승객은 다양한 연령과 체형의 사람들일 것
△위 조건에서 승무원을 포함한 모든 탑승객이 90초 안에 비행기 밖으로 탈출할 것

이 조건은 FAA 기준이지만, 지난번 기사에서 설명 드렸듯 미국에 입항하는 모든 항공기가 FAA 규정을 지켜야 하고, 미국의 항공 산업이 워낙 영향력이 크다 보니 사실상 모든 항공기 제작사가 이 조건을 만족하도록 비행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같은 ‘A320 패밀리’ 기종으로 분류되지만 탑승객 수만 다른 에어버스 A320(위)와 A321의 비상구 숫자 차이. 위에서 언급한 탈출 규정을 지키기 위해 승객 수가 많아지면 비상구 크기나 숫자도 함께 바뀌어야 합니다. 자료: 에어버스

본론으로 돌아가시죠. 각 항공기 제작사는 최소 좌석 간격을 28인치(약 71cm)로 설정하고 실험했습니다. 탈출 실험을 영상으로 촬영했고, 이를 FAA에 전달해 공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래 영상은 이 중 보잉에서 제공한 탈출 실험 영상입니다.

보잉社가 FAA 의뢰를 받아 실시한 승객 탈출 실험 영상 캡처. 10초 만에 승객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복도로 나와 있습니다. 자료: 보잉·FAA

▷3개 항공기 제작사의 탈출 실험 영상은 아래 주소에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https://www.regulations.gov/docket?D=FAA-2015-4011

실험을 끝낸 세 항공기 제작사는 비슷한 의견을 FAA에 전달했습니다. “좌석 간격이 탈출 시간에 영향을 준다고 볼 수 없다”는 결론입니다. 또 “탈출 시간에 가장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승객이 비상구 앞에서 탈출용 슬라이드로 뛰어내리기를 무서워해 머뭇거리는 시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탈출을 기다리는 뒷사람들을 줄 서게 만들고 결국 탈출 시간을 늘리는 제일 큰 원인(Key factor)이 된다는 겁니다.

항공기 탈출 훈련을 하는 승무원들. 각 항공기 제작사와 FAA는 이 과정에서 탈출에 걸리는 시간이 가장 많이 지체된다고 봤습니다. 동아일보 DB

FAA는 결론 보고서를 작성하며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승객이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승무원들은 가장 먼저 좌석벨트를 풀고, 일어서서, 비상구 앞으로 갑니다. 비상구에 있는 창문으로 ‘이 문을 열어도 되는지’를 살핀 후, 괜찮다고 판단하면 문을 열고 탈출용 슬라이드를 작동시킵니다. 훈련 받은 승무원이 이런 행동을 끝내는 데 약 10초가 걸린다는 게 FAA 설명입니다. 그리고 승무원이 이 절차를 밟는 동안 승객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탈출할 준비를 마친다는 겁니다. 아직 좌석에서 복도로 나오지 못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복도에 줄이 길기 때문이지 좌석 간격이 좁아서는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비행기 출입문을 조작하는 객실승무원. 숙련된 승무원은 비상 상황에서도 10초 안에 문을 열고 탈출용 슬라이드를 펼 수 있습니다. 출처: 데일리메일

소비자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결정은 결코 아닙니다. 처음 법원에 청원을 냈던 ‘플라이어스 라이트’ 역시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 단체의 대표인 폴 허드슨은 “관료주의에 물든 FAA가 안전과 편안함, 건강에 무리를 주지 않는 여행을 바라는 많은 이코노미석 승객을 비웃었다”며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온라인 등을 통해 강력한 반대 운동을 펼쳐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비영리 항공소비자 단체 ‘플라이어스 라이트’가 FAA 결론에 반박하며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 출처: flyersrights.org

FAA의 결론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항공기에서 빨리 탈출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승무원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벨트 풀어!” “짐 버려!”, “이 쪽으로!” “(비상구 밖으로) 뛰어!”같은 승무원의 큰 목소리와 강압적인 지시는 수십 년 동안 연구와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된 ‘최단시간 탈출 규범’입니다. 그러니 짐은 버리고, 무섭더라도 용감하게 뛰어내리셔야 합니다. 승무원 말을 듣고, 두려움을 참아내는 것만으로 함께 비행기에 탔던 승객의 목숨까지 구하는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급히 탈출할 때 모든 짐을 놓고 내리라는 지침은 국내외에서 꾸준히 강조하는 사안입니다. 사진처럼 짐을 들고 나오게 되면 뒷 승객이 탈출할 시간이 모자랄 수 있습니다. 출처: 美 CBS 홈페이지

한국 국적기는 외국 항공사의 좌석과 비교할 때 아직 좌석 간격에 그나마 여유가 있는 편이고, 서비스도 외항사보다 낫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하지만 요즘 항공업계에서 한국만큼 ‘소란스럽고 불편한 뉴스거리’가 많은 나라도 또 없어 보입니다. 최근 몇 년 간 크고작은 사고도 잇따랐습니다. 한 나라의 국적기는 외국인들이 한국을 찾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얼굴’인 동시에 국기를 동체에 그려 넣고 전 세계를 누비는 ‘국가대표’이기도 합니다. 태극기를 달고 하늘을 나는 국적 항공사들이 하루라도 빨리 다시 국민이 인정하는 우리의 날개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일터로 거듭나길 기대합니다.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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