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공감백서 맞아, 맞아!]정시 퇴근-휴가 보장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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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칼퇴근 꼭 지키세요”<사장님 지시>
“그럼, 새벽에 출근하란 얘기?”<멘붕된 사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야근을 하지 말라는 사장님 지시입니다. 오늘부터 원칙적으로 오후 6시에 퇴근하도록 합시다. 급한 일이 있으면…. 새벽에 출근하는 걸로 합시다. 5시쯤이 좋겠죠?”

대형 유통업체에서 일하는 정모 씨(28)는 몇 달 전 ‘멘붕(멘털 붕괴)’ 상태가 됐다. 팀장이 정시 퇴근 제도 도입을 알리는 동시에 새벽 출근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정 씨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시간 정도인데, 지하철이 안 다니는 4시에 집을 나설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결국 정 씨를 비롯한 팀원들은 야근할 일이 생기면 사무실 불을 끄고 문을 잠근 채 몰래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 ‘정시 퇴근’이라 쓰고 ’재택 야근’이라고 읽는다

최근 정시 퇴근 제도를 도입하거나 휴가 제도를 개선하는 기업이 빠르게 늘고 있다. 업체들은 ‘패밀리 데이’ ‘PC 오프 데이’ ‘뻔뻔한 퇴근’ 등 다양한 이름을 내걸었다. 비슷한 취지로 개선된 휴가·휴직 제도를 선보이는 곳도 많다.

하지만 상당수 직장인들은 이런 제도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중견 기업에서 일하는 정모 과장(36)은 요즘 ‘재택 야근’을 하고 있다. 정시 퇴근 제도를 도입한 회사에서는 매일 오후 6시만 되면 사무실 전기 공급이 끊기는 탓이다. 정 씨는 “매일 철야를 해야 할 만큼 일이 많은데 어떻게 정시 퇴근을 하느냐”며 “전기 공급이 재개되는 오전 6시에 출근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계열사에서 일하는 박모 씨(30)의 경우도 마찬가지. 박 씨의 회사는 정시 퇴근을 장려한다며 매주 수요일 오후 6시 이후 사내 전산망 접속 시간을 10분 이내로 제한하고 있다. 박 씨는 그 덕에 수요일에 야근을 할 때면 10분마다 ‘로그아웃→재로그인’을 반복한다. 박 씨는 “결재를 받으면 제한이 풀리지만, 지금까지 신청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야근을 공식적으로 금지하는 한 대기업에 다니는 장모 씨(29)는 ‘유연 근무제’를 이용해 사내 규정에 어긋나는 야근을 하고 있다. 출근 시간을 최대한 늦게 적은 뒤 규정 시간보다 초과 근무를 하는 편법이다.

○ “연차휴가 쓰기 어려워” 54%

휴직이나 휴가도 보장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결혼 3년차인 신모 씨(33)는 최근 태어난 첫딸과 아내를 위해 일주일짜리 배우자 출산휴가를 냈지만 4일 만에 출근했다. 회사에서 업무 관련 전화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신 씨는 “상사들이 ‘네가 몸조리하는 것도 아닌데 뭐 이리 오래 쉬느냐’고 면박을 주더라”며 한숨을 쉬었다.

생활가전 전문업체에서 일하는 김모 씨(29·여)는 “회사에서는 출산 휴가를 무조건 1년 동안 다녀오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출산 휴가를 6개월만 다녀와도 ‘대박’이라는 소문이 떠돈다”고 전했다.

이런 불만은 설문 조사에서도 나타난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전국의 직장인 12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3.9%(1009명)가 실제로 실행이 안 되는 ‘전시 행정이 있다’고 답했다. 특히 이들 중 절반이 넘는 55.7%(562명, 복수 응답)가 ‘말뿐인 정시 퇴근 제도’가 문제라고 답했다. ‘사용이 어려운 연차 휴가’를 꼽은 사람도 541명(53.6%)이나 됐다.

○ 과도한 업무량-경직된 직장문화 때문에…

제도의 취지와 달리 정시 퇴근과 확실한 휴가·휴직제도 사용이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직장인들은 과도한 업무량과 경직된 직장 문화를 주된 이유로 꼽는다.

금융업계 종사자인 홍모 씨(27·여)는 지난해 회사에서 ‘주말 근무 금지’ 지시를 받았다. 한 달 동안 실제로 주말 근무를 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다시 주말 출근을 하고 있다. 주말에 하지 못한 업무가 ‘주중 풀(Full) 야근’으로 돌아왔기 때문. 홍 씨는 “강제 정시 퇴근은 결국 ‘조삼모사’였던 셈”이라고 말했다.

말뿐인 정시 퇴근과 휴가 제도는 오히려 직장인의 의욕을 떨어뜨린다. ‘사람인’의 조사에서 전시 행정이 있다고 답한 직장인(1009명)의 73.6%(복수 응답)는 ‘허울뿐인 제도 때문에 애사심과 회사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졌다’고 답했다. ‘이직이나 퇴사를 고민하게 됐다’는 사람도 61.5%나 됐다. 지난해 취업포털 ‘커리어’가 직장인 67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직장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 1위는 ‘(정시가 됐을 때) 퇴근하겠습니다’(30.8%)였다. 직장 문화 서비스기업인 오피스N의 이관훈 이사는 “휴가를 가거나 퇴근을 할 때 죄책감이 들게 하는 분위기는 오히려 구성원들의 근로의욕을 저하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정시 퇴근#휴가#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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