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부탁해]그 엄마, 그 딸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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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들 늘 감싸던 故 박완서 작가… 재활병원에 1000만원 기부한 장녀

15일 개막한 ‘박완서, 배우가 다시 읽다’ 공연을 찾은 김성수 푸르메재단 이사장(왼쪽)이 고 박완서 작가의 큰딸 호원숙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호 씨는 최근 1000만 원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써 달라며 푸르메재단에 기부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5일 개막한 ‘박완서, 배우가 다시 읽다’ 공연을 찾은 김성수 푸르메재단 이사장(왼쪽)이 고 박완서 작가의 큰딸 호원숙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호 씨는 최근 1000만 원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써 달라며 푸르메재단에 기부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장대비가 계속돼서 개성역까지 가는 도중에 있는 냇물다리가 떠내려간 적이 있다.(중략) 호뱅이는 걱정 말라고 나를 안심시키고 짐을 먼저 강 건너에다 내려놓고 되돌아와 나를 지게 위에 올라 앉혔다. 그가 지게 작대기로 얕은 데를 골라가며 탁류를 헤치는 걸 지게 위에서 내려다보며 느낀, 노한 자연에 대한 공포감과 우직하고 강건한 남자를 미더워하던 마음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 있다.”

2005년 사회명사들의 원고를 모아 엮은 책 ‘사는 게 맛있다’에 수록된 고 박완서 작가(사진)의 글이다. 당시 일면식도 없던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가 “힘든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달라”며 원고를 부탁했다. 흔쾌히 응하며 박 작가는 어렸을 적 동네에 살던 머슴 ‘호뱅이’ 이야기를 써주었다. 호뱅이는 머리가 조금 모자랐지만 동네 대소사에 빠지지 않고 모든 이에게 도움을 줬던 사람이란다.

생전에 장애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간직했던 작가의 영향이었을까. 박 작가의 큰딸 호원숙 씨(57)와 유족은 최근 푸르메재단을 찾아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에 써 달라며 1000만 원을 기부했다. 이에 김성수 푸르메재단 이사장(81)이 15일 개막한 추모연극 ‘박완서, 배우가 다시 읽다’ 공연장을 찾았다.

호 씨는 “어머니는 동네에서 쓰레기 주우러 다니는 할머니들과도 허물없이 지내셨다”고 회고했다. 언제 저분들의 도움을 받을지 모른다며 풍족할 때일수록 어려운 사람들을 돌아봤다는 것. 박 작가가 타계한 이후 할머니들은 호 씨에게 “이 세상에 그런 분은 없었다”며 추모의 말을 전했다. 남을 돕는 삶을 내색하지 않았기에 박 작가가 푸르메재단에 4년 넘게 정기기부를 했다는 사실도 딸들은 뒤늦게야 알았다.

박 작가는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장애인 청소년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2008년 겨울 푸르메재단이 주선해 모인 이 아이들이 거제도로 졸업여행을 떠나자 거제도까지 찾아와 강연을 해주기도 했다. 손자뻘인 아이들에게 “너희 생각을 재미있게 써라”며 글 쓸 용기를 줬다. 박 작가는 “장애를 앓는 아이들이 정말 안타깝다. 아이들이 무슨 죄냐. 얼른 재활센터가 생겼으면 좋겠다”며 푸르메재단을 매년 찾기도 했다.

김 이사장은 “사촌여동생과 박 작가가 숙명여고 친구여서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다”며 “추모연극을 볼 수 있어 감회가 새롭다”고 전했다. ‘박완서, 배우가 다시 읽다’ 공연은 내년 1월 20일까지 서울 종로구 명륜1가 선돌극장에서 계속된다. 박 작가의 단편을 배우들이 낭독한다. ‘그리움을 위하여’(화요일) ‘티타임의 모녀’(수요일)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목요일) ‘그 살벌했던 날의 할미꽃’(금요일)이 차례로 공연된다. 낭독 공연이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더해져 문학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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