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행복한 사회]<3>워킹맘의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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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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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여성은 ‘출산 여성 30대에 추락’… 둘째 임신은 사표와 동의어

《 대한민국 ‘워킹맘’은 늘 미안하고 죄스럽다. 복귀한 직장에서는 “엄마가 되니 힘이 빠졌어”란 핀잔을 듣지 않으려고, 후배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곱절의 노력을 해야 한다. 집에서는 애 봐주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기분을 살펴야 한다. 그래도 잘살아보려고 하는 일이니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문제는 ‘엄마’가 됐다는 데 있다. 아이는 할머니만 찾고, 어느덧 ‘있으나 마나 한 엄마’로 전락한다. 대졸 직장 여성이 출산을 하고 난 뒤인 30대에 추락한다는 ‘여삼추’란 말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
○ 늘 미안해하는 엄마들

자녀 교육에 헌신하는 ‘맹모(孟母)’상이 적어도 워킹맘에게는 굴레다. 회사에 매여 있느라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호텔에서 일하는 김모 씨(39)는 퇴근이 아무리 늦어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의 가정통신문만큼은 꼼꼼히 챙긴다. 학교에서 보낸 알림장을 처음 봤을 때는 거의 암호 수준이었다. ‘독서록’이 무슨 뜻인지 한 학기가 지나서야 알게 됐단다.

“여름 방학식 날 다른 아이들은 책을 읽은 만큼 상을 받았지만 우리 아이는 하나도 못 받았어요. 내가 말로만 듣던 ‘엄따(엄마 왕따)’라는 걸 깨달았죠. 첫 학기를 망친 아들에게 미안해 밤새 울었어요.”

대학 강사 김현정 씨(41)는 초등학교 5학년 딸의 국어, 영어, 수학 세 과목 과외비로 월 100만 원 이상을 쏟아 붓는다. 다른 전업주부들은 그룹을 꾸려 과외를 하는데, 거기에 끼지 못해 과외비가 배로 드는 것이다. 그래도 홀로 공부하는 아이를 보는 안쓰러움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를 돌보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에게도 죄스럽다. 광고회사에서 팀장을 맡고 있는 송모 씨(36)는 “애 봐주시는 시어머니 눈치를 보느라 회사 일을 끝내지 못하고 퇴근할 때가 있는데, 회사와 시어머니 모두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송 씨는 최근 스트레스로 인한 원형탈모증까지 생겼다.

○ 무조건 맹모가 되라는 사회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사는 서지현 씨(39)는 경력 한 달 차 전업주부다. 지난달, 17년간 몸담았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오전 6시면 어김없이 눈이 떠진다. 부랴부랴 아이들 등교 준비 시키고, 출근 준비를 하다가 ‘아, 내가 왜 이러지’ 하며 주저앉는다.

서 씨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 곧바로 대기업에 연구직으로 취직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야간 대학원에서 석사과정도 마쳤고, 어느덧 차장 자리까지 올랐다. 이런 서 씨에게 회사를 관두도록 만든 것은 큰아이의 성적표였다.

큰아이의 성적은 중학교에 들어간 뒤 계속 떨어졌다. 아이 성격도 날로 비뚤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남편이 “당신 좋아서 직장 다니고 공부한 것 말고 아이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며 짜증을 냈다.

서 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집은 누구 돈으로 샀고, 아이 학원비는 누가 냈는지, 시댁 용돈은 어디서 나왔는지….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아이에게 헌신하는 엄마를 바라는 사회가 아닌가.

“직장 후배들에게 워킹맘은 직장 동료, 가족, 사회적 편견 등 만인과 전쟁을 벌이는 신분이라고 말하고 회사를 나왔어요. 이젠 억척스러운 엄마가 돼야겠죠?”

통계청에 따르면 20대 여성 취업자 수가 20대 남성을 추월한 지는 벌써 10년이 지났다. 1980년 20대 남성의 고용 비율은 80%였고, 20대 여성은 그 절반이었다. 2008년부터는 이 고용 비율마저 여성이 앞서기 시작했다. 여성도 당연히 일하는 시대가 됐지만 이 사회는 여전히 워킹맘의 죄책감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 둘째 임신하면 사표 써라?

지난해 8월 한국노동연구원의 조사결과 여성근로자 10명 중 8명이 출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거나 전직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아이를 낳고, 3개월의 출산휴가와 눈치껏 육아휴직 1년을 하고 나면 조직에서 잘나가는 것은 기대할 수 없다. 버티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아이가 하나일 땐 친정엄마, 시댁식구 등 가족 친지를 총동원해 안간힘을 쓰지만 아이가 둘이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둘째 임신은 ‘첫째에게 주는 선물’이 아닌 ‘직장 포기’와 동의어가 됐다. 이런 이유로 건설회사 기획팀에서 일하는 최모 씨(30)는 둘째를 바라는 시댁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

“이 악물고 일해 어렵게 핵심 부서로 발령을 받았는데, 다시 첫째 아이 때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요. 회식이나 모임 때는 대충 있다가 집에 가는데, 아이에게도 미안하고 회사에서도 ‘왕따’가 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거든요.”

아예 아이를 갖지 않는 ‘딩크족’의 길을 택하기도 한다. 최근 취업정보 사이트 ‘인크루트’가 미혼 여성 직장인 3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0.4%가 “직장생활을 위해 아이를 낳지 않을 생각도 있다”고 답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진현 수석연구원은 올 4월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저출산·고령사회 포럼’에서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워킹맘들이 직장과 가정을 행복하게 병행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는 아이 엄마라 따돌리고, 집에서는 아이 엄마가 제 역할을 못한다며 타박하는 분위기가 저출산의 요인이란 뜻이다. 결국 육아와 교육 문제를 사회가 일정 정도 떠안아주는 게 해법이다. 그게 안 되면 적어도 남편과의 역할 분담만이라도 이뤄져야 한다.

엄마가 행복한 사회 자문단인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워킹맘 지원책이 쏟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일하는 엄마를 당당한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선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석 교수는 “‘돌봄’은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인 만큼 사회 구성원들도 워킹맘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석 교수는 “워킹맘도 주변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가지는 대신에 스스로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모델을 만들어가는 개척자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남편이나 자녀 등 가족들도 일하는 엄마를 지지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 회사가 달라졌다, 엄마들이 행복해졌다 ▼

자아실현을 위해서건 생계를 위해서건 직장을 택한 ‘워킹맘’은 누구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하지만 최소한 ‘일보다 내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죄스럽지 않은 세상’을 만드는 것은 사회와 기업의 몫이다.

지난해 말 기혼 여성의 출산율 1.84명을 기록한 유한킴벌리의 사례가 대안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같은 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는 평균 자녀수) 1.22명을 훨씬 웃돌 뿐 아니라 유럽의 복지선진국인 덴마크(1.84명), 핀란드(1.86명)와 비슷한 수준이다.

6년 전인 2005년까지만 해도 유한킴벌리는 ‘저출산’ 기업이었다. 당시 기혼여성 출산율은 1.0명으로 우리나라 평균인 1.08에 못 미쳤다. 국내 일회용 기저귀 시장 점유율 1위인 회사가 저출산 기업이란 사실은 아이러니였다. 기업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출산율을 높일 필요가 있었다.

이때부터 유한킴벌리는 기혼 여직원 수, 육아휴직 이용률, 직원만족도 조사, 임산부 간담회 등을 실시해 제도를 보완해 나가기 시작했다. 사원들의 요구사항도 제도에 적극 반영했다. 워킹맘을 배려한 유연근무제나 직장어린이집과 육아휴직제를 활성화했다.

엄마가 된다는 게 떳떳해졌다. 사원들의 출산율은 해마다 상승했다. 애 딸린 엄마라는 이유로 인사고과에서 차별을 당하는 경우는 없다. 임원 33명 중 18%가 여성이다. 전체 직원의 84%가 기혼여성이고 이 가운데 워킹맘은 65%다.

사원들의 회사에 대한 만족도는 96.3%를 기록했다. 이직률은 0.2%에 불과하다.

이 회사는 워킹맘이 당당해지는 회사를 만들기 위한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이번에는 남자사원들이 대상이다. 현재 육아휴직을 한 남자사원은 1명뿐인데, 이를 더 늘리기로 한 것이다. “남자들이여. 육아휴직을 내라.” 요즘 이 회사의 모토다.

:: 특별취재팀 ::
▽팀장 김상훈 교육복지부 차장
▽팀원 정효진(산업부) 구가인(경제부) 신나리(국제부) 이새샘(사회부)
우경임 한우신 남윤서 최예나(교육복지부) 곽민영(문화부)

:: 엄마가 행복한 사회 자문단 (가나다순) ::

강지원 변호사
김미경 더블유 인사이츠 대표
김행미 KB국민은행 강동지역 본부장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이사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신의진 연세대 의대 교수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
이복실 여성가족부 청소년가족정책실장
임오경 서울시청 핸드볼 감독
전재희 국회의원·전 보건복지부 장관
전주원 전 여자농구 국가대표
정이현 소설가
조복희 육아정책연구소장
최성남 글로벌어린이재단 뉴욕 회장
한경희 한경희생활과학 대표
한영실 숙명여대 총장

:: 이런 엄마를 찾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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