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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미군 8명 생체해부실험, 규슈대 의대는 통렬히 반성한다”

입력 2015-05-04 03:00업데이트 2015-05-0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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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스미모토 히데키 규슈대 의대 학장 《 기자가 후쿠오카 도심에 위치한 규슈대 의대를 방문했던 지난달 20일, 교정에는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본에서 도쿄대 교토대에 이어 3대 의과 대학으로 꼽히는 이곳은 조용한 캠퍼스가 말해주듯 평소 미디어에 오르내릴 일이 별로 없는 곳이다. 그런데 지난달 4일 일본 국내는 물론 한국 신문에까지 떠들썩하게 학교 소식이 실리는 일이 있었으니, 104년 의대 역사를 보여주는 역사자료관을 개관하면서 ‘규슈대 의대 미군 포로 생체해부사건’이라는 과거사를 솔직하게 공개한 일이었다. 기자가 학교를 방문한 날은 월요일이라 자료관이 휴관을 하는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인 스미모토 히데키 학장을 비롯해 학교 관계자 10여 명이 모두 출근해 있었다. 이들의 표정에는 이번 일이 너무 떠들썩하게 알려지게 되어 부담스럽지만 자신들에 대한 한국 기자의 관심에 최대한 성의껏 답변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
규슈대 의대 캠퍼스 내 역사자료관에서 만난 스미모토 히데키 의대 학장. 그는 1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으로 어두운 과거사를 솔직하게 공개하기로 결정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이번 일은 모든 의대 교수진과 동창생들의 결정에 따른 것”이라며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다 드러내는 것이 진정한 역사관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후쿠오카=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허문명 기자
역사란 있는 그대로 봐야

외벽을 하얀색 페인트로 깔끔하게 칠한 목조건물(2층)에 마련된 자료관은 해부학 교실로 쓰인 강당을 개조한 것이라고 했다. 비용은 모두 동창생들의 기부(1억4500만 엔)로 충당됐다고 한다.

1층으로 들어서니 1911년 대학 설립에서부터 최근까지의 역사가 벽에 걸린 12개 나무 패널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아인슈타인 방문기나 나가사키 원폭 피해자들의 치료기록도 눈길을 끌었다. 홀 가운데에는 도자기로 만든 인체 해부 모형과 1회 졸업생들이 썼다는 현미경, 의학서적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국내외 언론에 소개된 문제의 과거사 기록은 12개 패널 중 11번째에 있었다. ‘생체해부사건’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5월부터 6월에 걸쳐서, 제국 육군의 감시 하에 규슈제국대학(현 규슈대) 의학부 외과 교관들이 해부 실습실을 이용해 본토 공습을 하다 포로가 된 미군폭격기 B29의 탑승원 8명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해서 전원이 사망에 이른 사건이다. ‘규슈대학 오십년사’에 따르면 실험의 주요 목적은 ‘인간은 혈액을 어느 정도 잃어야 사망하는가, 혈액 대용으로 생리 식염수를 어느 정도 주입할 수 있는가, 어느 정도 폐를 잘라내는 것이 가능한가’ 등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어 ‘전후(戰後) 군을 비롯해 규슈대학 관계자 총 30명이 기소돼 요코하마 군사법정에서 재판이 이뤄졌으며 총 2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적혀 있었다.

스미모토 학장 일행과 30여 분에 걸친 관람을 마치고 2층 회의실에 마주 앉았다. 학교 관계자들이 네모 형태로 죽 둘러선 뒤 기자와 통역이 가운데 앉았다.

기자가 “부끄러운 상처를 드러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는 말로 서두를 꺼내자 스미모토 학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 특별히 용기가 필요한 결단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역사란 것은 있는 그대로 즉, 긍정과 부정적 측면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 평소 우리의 생각이었다.”

안경테 너머로 보이는 학장의 두 눈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조용하고 낮은 톤의 목소리로 단어 한마디 한마디에 신중함을 싣는 그의 모습에서 의사이면서도 지식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역사자료관에 걸려 있는 ‘생체해부사건’을 설명하는 글.
―반대는 없었나.

“교수진의 반대는 없었지만 동창들(4500여 명) 중 일부 반대가 있었다. 하지만 일을 추진하는 데 어려운 점은 별로 없었다.”

―최종 문안(文案)은 어떻게 조율이 됐나.

“어려움이 있었다면 바로 그 대목이었다. 문구 하나하나를 결정하기까지 정말 어려움이 많았다(웃음). 교수 8명이 모여 만든 최종안을 교수진과 동창회원들이 모두 회람하면서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나.

“처음 토의를 시작한 것이 작년 여름이었고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해 문안을 결정하기까지 딱 2개월이 걸렸다.”

엄격한 의사 윤리관 알려주고 싶어


―규슈대 의대가 미군 포로를 상대로 한 생체해부에 관여한 것은 딱 한 차례라고 적혀 있는데 그 이상은 없나.

“없었다. 이번에 증언과 재판 기록을 샅샅이 훑었지만 그때 한 번뿐이었다.”

그는 “규슈대의 반성은 1948년 9월에 강당에서 교직원, 학생, 간호사들이 모여 ‘반성과 결의의 모임’을 한 것을 비롯해 이후 70년사(1992년), 100년사(발행 준비 중) 등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해왔다. 이번에 우리 학교의 숙원사업이었던 역사자료관을 개관하면서 아예 대외적으로 명시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의사의 꿈을 꾸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의사의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사라고 한다면 일반 시민들보다는 더 엄격한 윤리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기자는 이 대목에서 당시 생체해부 사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스미모토 학장은 대답 대신 3월 발간된 동창회보에 실린 글이라며 A4 용지로 된 프린트 물 하나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글의 필자는 1950년 졸업생 도노 도시오 옹(89)이다. 현역시절 의사 겸 소설가로 활동했던 그는 당시 의대생으로 생체실험을 목격하고 기록을 남겼다. 그의 증언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의 현장을 본 유일한 사람의 증언이어서 당시 사건에 대한 실체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으리라 보인다.”

글에는 당시 사건의 진상을 넘어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미치광이로 만드는지 절절하게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많았다. 글 중 일부를 옮겨본다.

‘1945년 5월 5일, 오키나와 전투에서 패색이 농후해지고, 일본의 육군 특정기지, 다치아라이 비행장(구루메 시 교외)도 미군 B29의 폭격을 받았다. 이때 미군기 한 대가 일본의 해군소년 항공병(19세)의 돌격 공격(가미카제의 공격을 뜻함)을 받았다. 탑승원들은 낙하산을 타고 차례로 낙하했다. 미군 11명 가운데 1명은 지역 주민과 자경단으로부터 죽창, 일본도, 낫 등으로 폭행을 당하자 피스톨을 꺼내 자살했으며 1명은 추락사, 1명은 사살됐다. 이 중 8명이 규슈대 의학부(해부학실습실)에 연행됐다.’

이 글에서 특히 기자의 눈길을 끌었던 대목은 필자가 평생을 끈질기게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시도한 끝에 마침내 1980년 6월 22일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피해 미군 비행기 B29를 몰던 기장이자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 왓킨스 씨를 직접 만나 인터뷰한 대목이었다. 다음은 사고 당일을 기억하는 왓킨스 기장의 말이다.

“그날 출격시간은 오전 1시였다. 목표로 삼은 일본의 비행장 폭격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 20km 정도 갔을 때 갑자기 전방에서 가미카제가 나타났다. …창문 유리가 부서지고 제4엔진에서 불길이 솟았다. 탑승원들에게 전원 탈출을 명령했다. 나도 추락 직전 낙하산을 꺼내 탈출했다.”

기장은 수건으로 눈을 가리고 수갑이 채워진 채로 기차에 실려서 다음 날 오전 9시경 육군 캠프(서부군사령부)에 도착해 3, 4시간 미국 기동부대의 동향, 괌 기지의 상황, 폭격경로 등과 관련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고 했다.

이 대목까지 읽다가 기자는 스미모토 학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다시 이렇게 물었다.

―이번에 과거사를 돌아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하다. 전쟁의 광기라고는 하지만 상부의 지시를 거부하지 못했던 선배 의사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말이다.

“글쎄…. 전쟁이 없었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그때 그 선배들 입장이라 했더라도 어떻게 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모두 전쟁 탓으로만 돌릴 것인가.”

학장은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의 얼굴을 보며 전쟁이 주는 상처에선 피해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는 생체실험에 참여했다고 고백한 도노 옹의 글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독자들이 읽기 쉽게 도노 옹의 글을 축약하면 이렇다.

아베 총리가 싫어해도 상관없다

‘당시 실험실에 들어가 심부름을 했던 내가 왜 양심이 아프지 않았는지 나중에 두고두고 뉘우쳤다. 사건에 관계된 (규슈대) 의사 중에는 마음 깊은 곳에서 지금도 죄의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왓킨스 기장을 만났을 때 “생체해부실험을 한 일본인들을 원망하는가” 물었었다. 기장은 “그들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다. 죽은 부하들은 가엾지만 그나마 마취로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죽었다는 것이 위안이 된다”고 했다. 이런 말도 했다. “(전쟁에) 이긴 쪽이라고 해서 영웅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생체해부) 사건에 대한 것은 35년 동안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왔다.”’

도노 옹의 글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왓킨스 기장은 전쟁이라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 외의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고 했다. 거기에는 승자의 자랑스러움은 작은 먼지만큼도 안 되고, 전쟁의 후유증을 가진 노(老)대좌(퇴역 후 승진)의 모습만 있었다.’

기자는 스미모토 학장과의 대화를 마치며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규슈대 의대의 과거사 공개에 대해 아베 신조 총리가 싫어하지 않을까”라고 물었다. 학장의 표정은 진지했다. “총리가 무엇을 생각하든 우리와는 관계없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대로 할 뿐이다.”

일본에는 아직도 이런 양심적 지식인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일본에 대해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쿠오카에서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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