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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바깥어른 밥상엔 갓 지은 밥만… ‘정치 끝낸다’ 실천한 남편 존경”

입력 2015-03-23 03:00업데이트 2015-03-23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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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의 사람이야기]故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의 부인 김영호 여사
고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의 아내 김영호 여사는 아흔을 넘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곱고 맑았다. 그는 평생 글리세린으로 자신이 직접 만든 화장수 외에는 립스틱조차 바른적이 없다고 했다. “부엌일 하느라 화장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고 한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허문명 기자
《 지난달 21일 별세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부인 박영옥 여사의 빈소는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 대한 관심이 집중됐다. 이념과 여야를 넘어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을 빈소로 불러들였던 JP의 실존적 힘과 그런 조문객들을 상대로 매번 다른 메시지를 던졌던 모습에 새삼 살아있는 정치 영웅으로 불릴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남편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내조한 박 여사의 삶은 어땠을까. JP가 그렇게도 아내를 사랑했다면 이는 아내로서도 반드시 이유가 있었을 터인데 그가 보는 JP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불행히도 고인은 가고 없다. 기자는 최근 우연히 고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의 부인 김영호 여사(91)에게서 박 여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장관들의 부인모임에서 종종 고인을 만났다는 것이다. 김 여사는 “고인이 투병생활을 시작하면서 못 본 지 10여 년이 되어가지만 활달하면서 정이 많고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강했던 사람”이라고 했다.》

‘나의 주방생활 50년’


김 여사 역시 파란만장 정치 역정을 걸어온 남편과 65년을 해로했다는 점에서 JP의 아내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남편은 2006년 작고한 소강(小崗) 민관식이다. 소강은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었던 인물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정치에 뛰어들어 5선 국회위원을 지냈으며 10·26 직후에는 국회의장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그가 인연을 맺었던 지도자들은 이승만, 조병옥, 김영삼, 김대중, 박정희, 김종필, 노태우, 전두환까지 이어진다.

생전에 문교부 장관, 대한체육회장, 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장, 서울아시안게임조직위원장,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등 일일이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직책을 맡았던 그의 개인사는 그 자체로 한국의 정치 사회사, 남북관계사, 체육사라는 평을 듣는다. 소강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부인 김 여사이다. 김 여사를 아는 사람들은 아내의 헌신적인 외조가 있었기에 소강이 있었다고들 한다.

20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만난 김 여사는 아흔을 넘긴 나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고 고왔다. 정신도 명료하고 목소리도 우렁찼다. 그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헌신적인 내조’이지만 따지고 보면 평생 돈하고는 담을 쌓아온 남편을 대신해 양조공장 벽돌공장 골프공 공장에서부터 마지막 한식당 사업까지 성공시킨 커리어우먼이기도 하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그는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그 시절엔 누구나 다 힘들게 살았다”고 짧게 답했다. 우선 그 유명한 내조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나의 주방생활 50년’(1995년)이라는 책을 보면 ‘남편과 겸상을 한 적이 없으며 남편이 식사하신 뒤라야 비로소 밥을 먹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정말인가요?

“바깥어른이 수시로 손님들을 집으로 초대하고 집밥을 즐겨 하셔서 늘 긴장하며 살았어요. 제 자랑 같지만 바깥어른 생전에 갓 지은 밥 아니면 상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한번 상에 올렸던 반찬도 다시 올리지 않았지요. 바깥어른이 쓰시던 그릇과 수저는 물론이고 컵 커피잔도 식구들이 함부로 손대지 못하게 했어요. 안에서 대접받는 사람이 밖에서도 대접받기 때문에 가장의 권위를 확고히 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제 부모님도 그렇게 사셔서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았어요.”

―지금 세상에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웃음)


“(함께 웃으며) 어떻게 제가 답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저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요. 가끔 돌이켜보면서 ‘아이고 그 힘든 고비를 용케도 넘겼구나’ 안도하면서 한숨을 쉬곤 하지요.”

개성 부잣집 맏딸로 태어나 초등학교 등하교 시절에는 인력거에 태워져 흙 한번 안 밟고 통학을 했다는 그는 가난한 민관식에게 시집오면서 혹독한 시집살이에 빈곤을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헌신적인 내조를 하셨는데 남편은 고마워했습니까.

“마음이야 있었겠지만 표현을 잘 안 하셨어요. 밖에서는 완벽한 분이었지만 아내라는 사람은 그저 당신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 정도로 알고 계셨으니까요. 집안일에 너무 무관심하셔서 어려운 일이 생겨 도움을 청하면 ‘밖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으니 말하지 말라’고 해 섭섭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의 말투는 느렸지만 겸손이 배어 있었다. 이번 인터뷰는 그가 펴낸 세 권의 요리책들에 삽입된 자서전 성격의 글들이 도움이 되었다.

마음 있어도 표현 못했던 남편

―책에 보니 부부가 함께 영화구경 간 것도 평생 단 한 번뿐이었다면서요.

“네…. 5·16혁명 직후에 느닷없이 영화구경 가자 하셔서 따라나섰어요. ‘연산군’이라는 영화였는데 마음고생하는 주인공 모습에 자꾸 내 신세가 겹쳐져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때도 고작 하신다는 말씀이 ‘영화 보러 왔지. 울려고 왔나’였어요.(웃음) 나이 드시면서는 저를 가끔 인정해주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래 봐야 ‘저 사람이 그토록 많은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텐데 아직 건강한 것을 보면 근본적으로 타고났다’는 정도였지요. 아내를 걱정해준다거나 심정을 헤아려준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모실 수 있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존경할 점이 많은 분이셨어요. 1981년에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이 잠실체육관에서 있었는데 그때 국회의장 대행 자격으로 함께 단상에 앉았지요. 제가 ‘더 이상 정치에 미련을 갖지 마시고 오늘로 끝내십시다’ 했더니 바로 승낙하셨어요. 이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으시더라고요.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던 13대 때에는 아예 지역구(중구)까지 찍어서 공천을 주겠다고 하는데도 정중히 사양하셨어요. ‘욕심이 과하면 안 된다’며 평생 원로 정치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장학사업으로 생을 마감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잘 섬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 여사는 요즘에 트렌드가 된 한식 세계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수백 명을 한꺼번에 먹이는 일에서부터 귀빈 접대까지 도맡아했던 그의 음식 솜씨에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계 인사, 외교관, 신문기자들까지 감탄해 기회가 있으면 한 번 더 맛보기를 원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 “장관 마누라가 무슨 음식 장사를 하느냐”는 말을 못 들은 체하고 쉰 넘은 나이에 이화여대 후문 앞에 한식당 ‘마리’를 열어 한식 코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선보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음식을 잘하시게 된 건가요.

“손님 대접하다 실력이 는 거지요. 음식은 저희 어머니가 잘하셨어요. 다 모친으로부터 배운 거예요.”

그의 책 출간 소식을 전했던 1990년 11월 22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김 씨의 부엌내조는 ‘주방에서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말을 들을 만큼 각계 인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국내 인사뿐 아니라 국제올림픽위원회 사마란치 위원장을 비롯해 프랑스 르몽드지 사장, 도쿄대 총장, 전 일본 중의원의장 등 한국을 찾는 외국 유명인사와 외교관들에게도 한식을 선보여 민간외교의 한몫을 했다.’

―큰 상도 타셨지요.

“(수줍게 웃으며)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4월로 기억해요. 제가 예순셋일 때인데 도쿄에서 제2차 세계요리대회(일본TV 주최)가 열렸어요. 누가 참가를 권했는지 아세요. 동아일보 김상만 회장님이셨어요. 제 솜씨를 익히 알고 계시던 회장님께서 한식을 꼭 세계에 알렸으면 좋겠다고 하셔서 나가게 된 거지요. 정성스럽게 재료를 다듬어 비빔밥을 내놓았는데 프랑스팀에 이어 2위인 외무대신상을 탔습니다. 내로라하는 세계 각국의 쟁쟁한 요리사들을 물리쳤다는 생각에 참 기뻤지요. 그때만 해도 외국인들에게 생소했던 비빔밥이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되었으니 그저 뿌듯합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외국분들이 맛있다고 하셔서 우리나라 음식이 세계적으로 우수하다는 확신이 강해졌지요. 다만 한꺼번에 상에 올려놓기 때문에 따뜻한 음식과 찬 음식이 그때그때 제 맛을 내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어요. 그래서 양식처럼 코스요리를 개발한 거지요.”

요즘엔 일반화된 한정식 코스 요리를 개발한 사람이 바로 그였던 셈이다.

자식 교육 걱정했던 육영수 여사

―육영수 여사와도 인연이 깊으시지요.


“생전에 자주 뵈었어요. 여사님이 장관 부인들 모임인 양지회를 통해 봉사활동을 많이 하셨어요. 저희들을 만나면 ‘애들 교육문제가 늘 걱정’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지요. 본인들이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길까봐 전차로 통학시킨다고도 하셨고요. 당시 코오롱에서 처음 양단 공단이 나올 때였는데 국산이 얼마나 좋은지 아느냐며 한복은 물론이고 청와대 커튼도 그걸로 하실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한 분이셨습니다.”

육 여사 이야기가 나오자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한번은 총리공관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30분이나 늦으셨어요. 그날따라 경호원이 ‘어디 가시느냐’ ‘몇 시에 오시느냐’ 캐묻는 게 너무 싫어서 청와대로 도로 들어갔는데 영애 근혜 양이 마음을 풀어주어 나오셨다는 겁니다. 청와대를 나오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그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흉탄에 쓰러지셨다는 소식에 놀라 서울대병원으로 갔는데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쓰러진 여사를 안고 차에 올랐던 탁 여인을 병원 앞에서 만났는데 그분 치마저고리에 육 여사 피가 흥건했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김 여사는 지금 막내아들(민병환 전 국정원 제2차장)과 함께 산다. 아들은 이날 장시간 인터뷰에도 묵묵히 모친의 말을 들으며 곁을 지켰다. 일제 식민지와 전쟁 분단 해방 그리고 혹독한 가난을 건너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온 한 여인의 삶을 단 하루 인터뷰로 듣기에는 벅찼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성공에는 김 여사 같은 수많은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자리였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기대수명이 늘고 고령인구가 많아지면서 미국의 재혼과 은퇴 문화에도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50, 60대의 이른바 ‘황혼 재혼’이 늘면서 재혼자 비중이 늘고, 은퇴 시기에 대해서도 ‘70세 이후에나 하겠다’ 또는 ‘(죽을 때까지) 안 하겠다’고 생각하는 인구가 급증하고 있다고 16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퓨리서치센터의 지난해 11월 조사 결과는 기혼자 중 23%가 이미 다른 결혼 경력이 1회 이상 있었다. 이는 1960년 13%보다 10%포인트가 높아진 것이다. 반대로 기혼자 중 초혼자의 비중은 감소했다. 남성 초혼자는 1996년 54%였으나 최근엔 50%로 줄었고, 여성 초혼자는 같은 기간 60%에서 54%로 감소했다.

미 인구센서스국이 2008∼2012년 인구 조사 자료를 근거로 산출한 결과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17%가 결혼을 2회 이상 했다. 인구센서스국이 재혼자 비중을 조사한 것은 처음이라고 WSJ는 전했다. 인구센서스국은 “1960년대 이후 중장년층의 재혼 삼혼이 꾸준히 늘고 있다”며 “특히 여성은 50대 이상, 남성은 60대 이상이 재혼자 비중 증가세를 이끌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무엇보다 수명이 예전보다 늘었다. 이혼하고, 다시 새 가정을 꾸릴 시간이 더 많아졌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세계보건기구(WHO) 통계(2012년 기준)에 따르면 미국인의 기대수명은 79.8세(남자 77.4세, 여자 82.2세)다.

수명이 늘면서 은퇴에 대한 생각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고 WSJ는 보도했다. 중소기업 컨설턴트인 재키 피터슨 씨(71)는 “100년 전과 비교하면 평균수명이 25년이나 증가했다. 건강이 유지되는 한 은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한 노동연구소의 설문조사 결과는 피터슨 씨 같은 사람이 급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9년 조사에선 ‘60세 이전에 은퇴하겠다’는 사람이 조사 대상자(1000명) 중 17%였으나 2014년의 같은 조사에선 9%로 크게 감소했다. 반면 ‘예상 은퇴 시기는 70세 이상’이란 대답은 14%에서 22%로, ‘아예 은퇴하지 않겠다’는 대답은 5%에서 10%로 증가했다.

WSJ는 “재혼과 은퇴 시기는 노년의 경제적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라며 “‘황혼 재혼’한 부부는 같은 나이의 독신보다 생활이 훨씬 안정된 경우가 많고 일반적 은퇴 시기에 계속 일해 고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노후 재테크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보도했다.

뉴욕=부형권 특파원 bookum90@donga.com■ “한국 축구의 아이콘 차두리, 마지막 경기서 박수 받고 떠나라”

소극적인 은퇴식 보다 은퇴경기 주문
31일 뉴질랜드와 평가전 선발로 기용

이제 그에게 “I‘ll be back”이란 없다. ‘차미네이터’는 그라운드를 질주하며 태극마크와 작별을 고한다.

축구국가대표팀 울리 슈틸리케(61·독일) 감독이 17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차두리(35·FC서울)의 국가대표 은퇴경기에 대한 구상을 밝혔다. 이날 슈틸리케 감독은 우즈베키스탄(27일·대전), 뉴질랜드(31일·서울)와의 평가전에 나설 23명의 대표선수 명단을 발표했다. 차두리의 이름도 포함돼 있었다.

차두리는 1월 호주에서 열린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결정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명단을 발표하기 전 차두리와 직접 면담했다. 분명하게 국가대표 은퇴 의사를 재확인했다”고 밝혔다. 대한축구협회는 A매치 70회 이상 출전을 은퇴식 개최의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있다. 차두리는 A매치 75경기를 소화해 이 자격요건을 충족한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전까지는 전반전 종료 이후 은퇴식을 하는 다소 소극적인 은퇴행사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차두리에게는 단순한 은퇴식이 아닌 은퇴경기를 치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할 것이다. 그는 대표팀을 위해 자부심을 갖고 활약한 선수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차두리는 대표팀이 우즈벡전을 치르고 서울로 복귀한 이후인 29일 오전 훈련부터 합류한다. 31일 뉴질랜드전에는 선발로 출격할 예정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만약 내가 선수라고 해도 하프타임에 관중석에서 내려와 꽃다발을 받고 은퇴하는 것보다 은퇴경기를 직접 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차두리가 선발로 나와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전반 종료 2∼3분 전에 교체해 기립박수를 받을 기회를 주고 싶다. 이후 하프타임에 은퇴식을 열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가대표 은퇴식이 열리는 경기에서 해당 선수가 그라운드를 누비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황선홍(포항 감독)과 홍명보(전 대표팀 감독) 역시 2002년 11월 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브라질과의 평가전에서 은퇴경기와 은퇴식을 동시에 치렀다. 당시 홍명보는 선발 출전해 72분을 소화했고, 황선홍은 후반 종료 2분을 남기고 투입돼 팬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차두리도 후반 교체선수로 출전했다.

한편 슈틸리케 감독은 차두리를 대체할 라이트백 자원에 대한 실험도 예고했다. 그러나 그 구체적 내용에 대해선 “해당 선수와 공감대를 쌓은 뒤 밝히겠다”며 말을 아꼈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트위터 @setupman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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