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60년, 참전 16개국을 가다]<17>벨기에 남작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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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5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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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장관도 소령으로 참전하는데…” 19세 귀족, 사병 자원

시몽피에르 노통브 남작이 6·25전쟁 당시 병원에서 만난 한국인 자매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과 1998년 유로 파코리아를 설립한 이후 한국문화를 벨기에에 알리기 위해 만든 각종 팸플릿과 책자를 보여주고 있다.
시몽피에르 노통브 남작이 6·25전쟁 당시 병원에서 만난 한국인 자매와 함께 찍은 흑백사진과 1998년 유로 파코리아를 설립한 이후 한국문화를 벨기에에 알리기 위해 만든 각종 팸플릿과 책자를 보여주고 있다.
장교 - 사병 구분 없다
“귀족이라고 장교돼야 하나”
1953년 통신병으로 격전치러

한국문화 전도사
부상 치료중 한국음식에 매료
은퇴후 ‘코리아 알리기’ 활동


《1952년 7월 4일. 19세의 젊은 귀족 시몽피에르 노통브 씨는 벨기에 국방부를 찾았다. 그날은 그의 생일이자 ‘성인이 되는 날’이었다. 노통브 씨는 6·25전쟁 참전 신청서에 서명했다. 장교가 아닌 일반 사병 자격이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의무다. 하지만 군인으로서 귀족 남자의 이상적인 모습은 장교지 사병이 아니야!” 집에 돌아와 참전 사실을 알리는 노통브 씨에게 아버지 피에르 노통브 남작이 역정을 냈다. 벨기에 상원 외교위원장인 아버지는 “귀족은 장교로 참전해야 격에 맞는다”며 강하게 아들을 말렸다. 나이가 어린 점도 반대 이유였다. 노통브 씨의 형들은 벨기에 왕립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6·25전쟁에 참전한 시몽피에르 노통브 남작의 참전 당시 모습.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6·25전쟁에 참전한 시몽피에르 노통브 남작의 참전 당시 모습.
○ 참전: 사병 자격으로 전쟁터에

“많은 귀족이 먼 나라 한국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네. 설상가상으로 귀족이 사병으로 참전하겠다는 것은 ‘스캔들’이나 다름없었지.”

그러나 벨기에의 명예를 걸고 한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에 요구되는 높은 도덕적 의무)’에 장교와 사병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젊은 노통브 씨를 자극한 것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모로 드 믈랑 상원의원(2002년 작고)의 참전이었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믈랑 의원은 1950년 6·25전쟁 지원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무회의에서 장비 지원으로 제한하자는 제안을 일축하고 파병을 주도했다. 더욱이 그는 1951년 48세의 나이에 통신장교(소령)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이를 위해 당시 상원의원의 해외 참전을 금지한 법률이 개정되기까지 했다.

믈랑 씨는 1988년 펴낸 회고록에서 “한국전쟁은 한 국가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벨기에도 한국처럼 열강에 둘러싸인 소국이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한국을 도와야 했다. 전쟁은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전쟁 한가운데서 전우를 위해 목숨을 희생할 수 있는 위대한 창조물이다”라고 썼다.

“믈랑 씨의 참전을 보고 의지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명감이 생겼네.”

1952년 말 노통브 씨는 통신병으로 한국행 배에 올라탔다. 벨기에는 1951∼1955년 한국에 모두 3171명을 파병했다. 이 중 귀족 출신은 22명이었다.

○ 부상: 중공군 수류탄에 다리 다쳐

노통브 씨는 1953년 2월 벨기에대대가 중공군 70사단을 맞아 치열한 방어전을 벌인 잣골전투(강원 철원군)에 배치됐다. 3월 중공군이 또다시 기습을 시작했다. 적을 향해 정신없이 사격하던 노통브 씨 주변에 수류탄이 떨어졌다.

“쾅!”

사격에 집중한 나머지 다친 줄도 몰랐다. 사격을 계속했다. 의무병이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 달려왔다. “정신을 차려보니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네. 그때서야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왔어.” 의무병은 알코올을 병째로 먹였다.

후송차로 이동해야 했다. 다른 전우가 그를 업었다. 알고 보니 그 병사는 눈을 다쳤다. “내가 그의 눈이 되고 그가 내 다리가 돼 전장에서 벗어났네.” 벨기에 신문에는 노통브 남작의 아들이 부상당했다는 기사가 났다.

○ 후송: 한국음식에 매료되다

노통브 씨는 부산의 스웨덴병원으로 후송됐다. 미세한 수류탄 파편 25개가 왼쪽 다리에 집중적으로 박혀 있었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노통브 씨는 스웨덴병원에서 6주를 보내면서 한국과 한국인의 진정한 면모를 알게 됐다. 그는 특히 어느 10대 자매와 어머니를 잊지 못한다. 그는 유독 명랑했던 자매와 금세 친해졌다.

“언니가 열여덟 살이었지. 동생은 나이가 생각나지 않는군. 자매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네. 전쟁 뒤에 삶을 일으키기 위해 영어를 배운다고 말했어. 그 모습이 파라다이스와도 같았지.”

그는 자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자매는 병원 식당에서 한국음식을 손수 만들어줬다. “김치와 잡채, 비빔밥…. 기름기 많은 서양식 전투식량에 질린 나로서는 담백한 한국음식에 완전히 매료됐네. 중독이었지.”

자매의 어머니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한국이 일제강점기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한국의 역사를 설명해줬다. 노통브 씨는 차분하고 지적이었던 그녀를 통해 한국을 알아갔다.

6주 뒤 그는 다시 전선에 배치됐다. 보통 연합군과 한국군 병사는 배식을 따로 받았고 연합군은 한국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그가 한국군 배식 줄에 서서 김치를 달라고 부탁하자 모두 놀랐다.

○ 전후: 유럽에 한국을 알리다

1954년 귀국한 그는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일했다. 1992∼1998년에는 유럽연합(EU) 경제사회이사회 사무총장도 지냈다. 바쁜 업무 속에서도 한국을 잊지 못했다.

1998년 노통브 씨는 은퇴와 함께 ‘유로파코리아’를 만들었다. 유로파코리아는 애초 벨기에에 입양된 한국 젊은이들에게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됐다.

점차 문화행사가 많아지고 벨기에 주재 한국대사관과도 함께 행사를 열며 유로파코리아는 벨기에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통로로 확대됐다. 노통브 씨는 특히 한국음식의 매력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제육볶음이다.

“한국문화는 미국문화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세계적으로 발전하고 있네. 특히 음식문화가 그렇지. 그 점이 존경스러워.”

노통브 씨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물었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 아직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 한국인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어. 사소한 예지만 지위 높은 한국인들은 전부 외제차를 타더군. 한국에 그 지위에 걸맞은 좋은 차가 그토록 많은데 말이야.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모국 사랑에서 출발해. 전쟁을 극복하고 지금의 모습을 이룩해낸 용기에 왜 자부심을 갖지 않는지….”

노통브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그는 ‘살인자의 건강법’ 등으로 한국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아멜리 노통브 씨의 삼촌이다.
▼“하룻밤 포탄 3500발 비오듯… 매일 죽음의 공포”▼
■ 참전용사의 잣골전투 회고

벨기에참전용사회 회장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1953년 강원 철원군 최전선에서 벌어진 잣골전투에서 보병중대를 이끌었다. 잣골전투는 중공군과 가장 치열하게 치른 전투 중 하나다.

“하룻밤에 3500여 발의 포탄이 떨어졌소. 본국 귀대 하루 전 포탄에 맞아 전사한 중대원도 있었지. 중공군의 공격 징후를 알자마자 쏟아지는 포탄들이 정말 지긋지긋했어. 반격을 위해 포를 조준하면 이미 중공군은 사라지고 없었지.”

포탄 소리의 끔찍함에 대해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철로에 묶인 채 전력질주하는 기차 아래 누워 기차 소음을 밤새 듣는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솔직히 말해 정말 두려웠네. 매일 밤 ‘오늘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 포탄에 파묻혀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와 싸워야 했지. 잠을 자고 깨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어.”

전장에 즐비한 시체들도 그를 괴롭혔다. “적군과 아군 할 것 없이 시체가 너무 많아 부대가 이동할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시체를 길 양쪽으로 치워야 했지. 그 쌓여가는 시체들….” 그는 그 충격 때문에 전투식량으로 지급된 고기를 먹지 못할 정도였다.

브뤼셀지회 부회장인 르네 베르 씨는 1951년 4월 임진강에서 중공군 제188사단과 치른 전투를 떠올렸다. “전투를 치른 지 2개월 뒤 격전지에 돌아와 보니 민간인과 군인들의 시체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지. 그 와중에 군복과 전투화 등 ‘살아 있는 자’를 위해 쓸 만한 것들을 찾는 내가 비참해졌지. 그만큼 참혹했어.”

마르셀 샤네 씨는 1953년 4월 잣골전투에서 왼팔을 잃었다. 그의 나이 19세였다. 오전 2시경 포격에 막사가 무너지며 팔이 깔린 것이다. 눈앞에서 전우 3명이 전사했다. 그는 “비로소 내가 전쟁 한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참전을 후회하지 않았다. 카우엘라어르트 씨는 “제2차 대전 때 레지스탕스로 참전했지만 최전선은 아니었다. 6·25전쟁에서 군인으로서 진정한 전쟁을 수행했다”고 말했다.

참전용사회 부회장인 마르셀 와트 씨는 “2003년 한국에 갔을 때 한 택시운전사는 우리가 참전용사라는 말에 택시를 세운 뒤 정중히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건넸다. 한국인들은 우리의 참전을 잊지 않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벨기에 참전용사들이 지난달 7일 벨기에 주재 한국대사관에 모여 참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몽피에르 노통브, 마르셀 샤네,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알베르 드웨베, 마르셀 와트, 르네 베르 씨.
벨기에 참전용사들이 지난달 7일 벨기에 주재 한국대사관에 모여 참전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몽피에르 노통브, 마르셀 샤네, 쥘리앙 판 카우엘라어르트, 알베르 드웨베, 마르셀 와트, 르네 베르 씨.

▼당시 참전부대 건물에 ‘임진’ ‘잣골’ 등 이름 붙여
부대 안에 ‘6·25 박물관’도 참전용사 3171명 명단 기록▼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북쪽으로 100km 떨어진 안트베르펜(영어명 앤트워프) 지역 티엘렌 시에 있는 6·25 참전부대인 제3공수대대 건물들에는 ‘임진’ ‘학당리’ ‘잣골’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벨기에 대대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들이다.

이 부대는 1952년 6·25전쟁에서 전사한 피에르 가일리 대령의 이름을 따 ‘가일리 대대’로도 불린다. 벨기에의 왕위계승자인 필리프 왕세자가 군복무를 한 곳이기도 하다.

부대 안에 6·25전쟁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박물관 앞 포탄 모양의 이정표에 ‘한국박물관’이라고 한글로 적혀 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니 참전용사 3171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적혀 있다. 이 부대에는 6·25전쟁 참전용사들의 후손이 많이 복무하고 있다. 박물관에 따라 들어온 파트리크 비넨페닌츠크 대위(30)가 이 명단에서 한 명을 가리켰다.

“우리 할아버지입니다. 힘든 전쟁이었다며 6·25전쟁에 대해 자세히 얘기하진 않으셨지만 항상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한국과 한국인들을 소중하게 생각하셨죠.”

그는 “사관학교 필수과목인 군 역사에 6·25전쟁이 포함돼 있고 특히 임진강 학당리 잣골전투는 자세히 배운다”고 말했다.

박물관 입구에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써놓았다. 한국박물관 관리위원인 참전용사 코르 페이트 씨(81)에게 참전이 잊혀지고 있는지 물었다. 페이트 씨가 웃으며 출구를 보라고 했다. 출구엔 ‘더는 잊지 않는다(Forgotten No More)’고 씌어 있었다.

글·사진 브뤼셀·티엘렌=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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