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은 일어난다]②죽음보다 더 무서운 사회적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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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9일 15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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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4명 중 3명이 에이즈 환자인 푸름이 네(1회 기사 참조). 하지만 열두 살 푸름이는 여느 10대 소녀와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 부모가 푸름이의 병을 철저히 숨긴 덕이다.

국내에서 첫 에이즈 환자가 나온 지 올해로 25년. 에이즈는 여전히 '불결한' 전염병으로 내몰리고 있다. 감염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가족에게조차 외면 받는다. 감염인들은 사회의 냉대와 차별이 죽음보다 더 무섭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다시 확인하신 후…."

A 씨(50)는 몇 년 째 없는 번호로 전화를 건다. 혹시 받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매번 더 큰 절망감으로 다가오지만, 이 번호를 지울 수가 없다.

"올해 많이 힘들었을 텐데, 시험을 잘 봤는지 궁금하네요."

A 씨의 둘째 아들은 올해 수학능력시험을 봤다. 결과도 궁금하고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주고 싶지만 연락처조차 모른다. 예전 번호는 끊긴 지 4년이 넘었다.

2005년 6월 병실을 나서면서 먼발치에서 둘째아들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지금쯤 어린 티를 벗고 수염도 거뭇거뭇 났을 둘째 아들 생각에 A 씨는 연신 담배를 물었다.

당시 그는 감기가 심해 병원을 찾았다. 대수롭지 않던 일상중 하루였던 그날,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다. 에이즈 감염 판정을 받으면서 죽음보다 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진 것.

아내는 입원해있는 그에게 이혼서류를 보내왔다. 가족과의 생이별은 그렇게 시작됐다. 공무원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A 씨가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하기까지 딱 1년 반이 걸렸다.

2007년 초, 2년 만에 큰아들을 만났다.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았다. 하지만 아들은 식당 문 앞에서 돌아섰다.

"우린 잘 살고 있어요. 약속이 있어 먼저 가 볼게요."

밥 한 끼조차 먹이지 못한 아비는 사라져가는 아들의 뒷모습만 멍하니 바라봤다.

"그래도 큰놈은 가끔 전화를 받아요. 일년에 한두 번…."

그는 가끔 지인에게서 걸려오는 전화가 부담스럽다. 자신의 병을 알리기 싫어서다. 번호를 바꾸면 될 일이지만 그럴 수가 없다.

"언젠가는 우리 막내가 아빠를 찾을 텐데…. 죽을 때까지 이 번호를 바꿀 수가 없어요."

에이즈 감염 뒤 가족과 연락이 끊긴 A 씨가 자식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적은 자필 메모.
에이즈 감염 뒤 가족과 연락이 끊긴 A 씨가 자식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적은 자필 메모.


12월 1일은 '세계 에이즈의 날'이다. 에이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리고 예방사업을 펼치기 위해 UN이 제정한 날이다. 올해로 22년째를 맞지만 에이즈 감염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눈은 늘 차갑기만 하다.

본보 취재팀이 11월 21, 22일 남녀 229명을 대상으로 에이즈를 얼마나 정확히 알고 있는지, 에이즈 감염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설문조사한 결과, 에이즈에 대한 지식은 늘었지만 태도는 더욱 나빠졌다는 점이 확인됐다.

에이즈에 감염되더라도 관리만 잘 하면 20년 이상 살 수 있다는 사실을 77%가 정확히 알고 있었다. 2005년 질병관리본부가 조사했을 때보다 20% 포인트 가까이 올라간 정답률이다. 콘돔으로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다는 점도 10명 중 8명이 제대로 알고 있었다. 이 수치 역시 4년 전보다 20% 포인트 오른 것이다.

키스로 에이즈가 옮지 않는다는 사실은 2005년 절반에 못 미치는 48%만이 맞췄지만, 올해 본보 조사에서는 64%가 제대로 알고 있었다. 또 응답자의 95%는 악수와 같은 가벼운 신체접촉으로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점을 정확하게 알았다.

하지만 질문을 조금만 바꾸면 답변은 달라졌다. 에이즈 환자를 사회적으로 격리시켜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30%가 '그렇다'고 말했다. 가족 중에 에이즈 감염인이 생기면 함께 지낼 수 없다는 응답자도 26%나 됐다. 10명 중 5명은 에이즈 감염인이 다니는 학교에 자녀를 보내지 않겠다고 답했다.

또 에이즈 감염인을 직장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데 30%가 동의했다. '에이즈 감염인과 직장생활을 같이 하면 감염될 수 있느냐'는 문항에는 무려 82%가 그렇지 않다고 답한 것을 보면 지식과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에이즈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묻자 86%가 '죽음', '성병', '동성애', '문란함'과 같은 부정적 단어를 연상했다. '치료가 가능하다', '편견', '불쌍하다'와 같은 긍정 또는 중립적 단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의사들조차 에이즈 감염인을 꺼렸다. 본보 취재팀이 대장·항문외과 20곳에 에이즈 환자임을 밝히고 치질 수술을 받을 수 있는지 묻자 11곳이 수술을 거부했다.

국립의료원의 신형식 감염센터장은 "에이즈는 일상적으로 옮는 병이 아님으로 격리나 관리의 필요성이 높지 않다"며 "에이즈 감염인을 일반인과 분리할수록 사회적 비용은 늘어난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국내 에이즈 감염인이 정부가 파악한 6690명 보다 훨씬 많은, 최대 4만20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상당수가 사회의 냉대와 차별 앞에서 감염 사실을 숨기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확한 통계조차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사회적 비용일지 모른다.

▼ 에이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

1. 에이즈도 제대로 치료하면 20년 이상 생존할 수 있다.
2. 에이즈 감염인과 키스를 하면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다.
3. 에이즈 감염인과 변기를 같이 사용하면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다.
4. 성관계시 콘돔을 사용하면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다.
5. 에이즈 감염인와 학교나 직장 생활을 같이 하면 감염될 수 있다.
6. 에이즈 감염인과 물 컵을 같이 사용하면 에이즈에 감염될 수 있다.
7. 에이즈 감염인과 악수를 하면 감염될 수 있다.


▶ ‘에이즈에 대한 태도 변화’ 설문조사 파일

▽ 특별취재팀
강경석 수습기자 coolup@donga.com
강은지 수습기자 kej09@donga.com
박승헌 수습기자 hparks@donga.com
박희창 수습기자 ramblas@donga.com
장관석 수습기자 jks@donga.com
차현주 수습기자 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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