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우리곁으로]D-9, 문화재에 얽힌 사연들

  • 입력 2005년 9월 2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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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복원된 광통교.
최근 복원된 광통교.

《20일 낮 12시 반경 서울 중구 청계1가. 최근 복원된 청계천 광통교(廣通橋·광교)를 구경하기 위해 인근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더러는 난간을 쓰다듬고 더러는 밑으로 내려가 석축을 둘러보았다. 원래 위치가 아니라 상류로 200m 올라온 곳에 복원되어 아쉽긴 하지만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도로 아래에 묻혔던 광통교가 47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광통교를 비롯해 청계천 주변엔 소중한 문화재가 적지 않다. 조선시대 이래 청계천과 함께 흘러온 역사와 문화, 서울 사람들의 애환의 흔적이다.》

청계천의 대표적인 문화재는 교량이다. 청계천 본류에는 모전교(毛廛橋), 광통교,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水標橋), 오간수교(五間水橋), 영도교(永渡橋), 하랑교(河浪橋) 등 10여 개의 조선시대 다리가 있었다. 청계천을 복개하면서 모두 철거됐고 일부 또는 전체가 남아 있는 것은 광통교와 수표교뿐.

청계2가에 있었던 광통교는 광통방(廣通坊) 근처에 세워졌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폭이 길이보다 넓은, 보기 드문 다리다.

광통교는 원래 청계2가에 있었으나 청계천 복원 공사 과정에서 200여 m 상류의 청계1가로 옮겨 복원됐다. 신원건 기자

이 다리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로 추정된다. 처음엔 흙으로 만들었으나 태종 때인 1410년 폭우에 떠내려가자 돌로 다시 만들었다. 당시 태종은 서울 중구 정동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康氏)의 무덤 정릉(貞陵)을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기면서 묘를 장식한 돌 일부를 뽑아 광통교의 교각 받침 등으로 사용했다. 자신의 계모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신덕왕후에 대한 일종의 복수였다.

광통교는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 때 도로 밑에 묻혔고 이번 청계천 복원을 계기로 청계1가로 옮겨 옛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수표교…세종때 축조, 지금은 장충단 공원에

청계3가 수표교와 수표의 1950년대 모습.

청계3가에 있던 수표교는 세종 때인 1420년에 만들어졌다. 이곳에 마구(馬具)를 파는 마전(馬廛)이 있었다고 해서 마전교로 불렸으나 1441년 하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를 세운 뒤 수표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표는 원래 나무기둥으로 만들었으나 15세기 말 성종 때 돌로 다시 만들었다. 이때 만든 수표석(水標石·보물 838호)은 직육면체의 기둥과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단정하고 아름답다.

수표와 수표교는 1959년 중구 장충동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 그 후 수표는 다시 동대문구 청량리동의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이전되었다.

수표교는 난간을 연꽃 봉오리 모양으로 장식하는 등 전체적으로 세련된 모습이다. 교각이 2단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현재의 수표교는 1760년 영조 때 수리한 것이다. 원위치로 이전해 복원할지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오간수교…“임꺽정 쇠창살 부수고 탈출” 전해져

1900년대 초의 청계6가 오간수문과 오간수교.

조선 개국 초기에 세워진 흥인지문(興仁之門·동대문) 옆 오간수교는 원래 성벽의 수문(水門)이었다. 물이 빠져나가는 홍예(虹霓·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5개라고 해서 오간수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앞에 긴 돌을 놓아 다리로 활용하면서 오간수교로 불리게 되었다. 1908년엔 아예 성벽을 걷어내고 다리를 새로 놓았고 1926년 6월엔 순종황제의 국장 행렬이 이곳을 지나갔다.

오간수문엔 임꺽정의 전설이 서려 있다. 임꺽정이 옥에 갇힌 가족을 구한 뒤 오간수문의 쇠창살을 부수고 탈출했다는 얘기다.

2003년 말 오간수교 아래 하천 바닥에서 오간수문의 쇠창살 조각과 600닢(19세기 기준으로 쌀 한 가마를 살 수 있는 액수)가량의 상평통보 꾸러미가 발굴됐다. 당시 중앙문화재연구원 발굴단은 “누군가 오간수문으로 몰래 도성을 드나들다 상평통보를 흘린 것 같다”고 추정했다.

#동묘…관우사당, 임진왜란 직후 세워

삼국지 영웅 관우의 사당인 청계7가 북쪽의 동묘. 동아일보 자료 사진

청계7가 북단엔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 관우의 상을 모셔놓은 동묘(東廟·보물 142호)가 있다. 원 이름은 동관왕묘(東關王廟)로, ‘동쪽에 위치한 관우의 사당’이라는 뜻.

관우는 중국 도교에서 신성불가침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한국에서 관우 숭배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 군대는 관우의 신령이 도와 왜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1601년 동묘를 세운 것이다. 무속인,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 사람, 돈을 벌고 싶어하는 사람, 바둑을 두러 오는 노인 등 매일 수백 명이 이곳을 찾는다. 유명한 정계 재계 인사들도 온다고 한다.

청계8가에 이르면 느닷없이 거대한 콘크리트 교각 3개를 만나게 된다.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면서 교각 3개를 남겨둔 것이다. 예기치 못한 이 교각에 놀라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교각은 20세기 중후반 청계천의 흔적이다. 수백 년이 흐른 뒤 교각 역시 청계천의 소중한 문화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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