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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8월 15일 18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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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눈의 ‘남만인(南蠻人)’에게 17세기 조선의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헨드리크 하멜. 1653년 8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서기는 상선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하고 있었다.
제주도 근해에서 풍랑을 만나 지금의 남제주군 산방산 아래 용머리 해안가에 닿는다. 선원 64명 가운데 36명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제주목사 이원진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객사로 데려와 따뜻한 탕(湯) 한 사발씩을 내렸는데, 하멜 일행은 독약인줄 알고 대성통곡을 하며 마셨다고.
이들은 광해군이 유폐됐던 초가에서 지냈다.
조정에서 통역관이 내려오자 하멜은 깜짝 놀랐다. 그는 같은 네덜란드 사람인 얀 벨테브레(한국명 박연)였다. 하멜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으나 그의 얘기를 듣고 낙담한다. “너희들이 새라면 몰라도…. 외국인은 나라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지내다보면 정붙이고 살만한 나라다.”
조선여자와 결혼해 남매를 두고 있던 박연은 이미 반(半)은 조선인이었다.
서울로 압송된 하멜 일행은 효종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이들에게 호패를 내리고 훈련도감에 배속시켰다. ‘북벌정책’에 쓸 요량이었으나 실제로는 잡역에 동원되거나 ‘구경거리’로 불려 다니는 게 일이었다.
그러던 중 하멜일행이 조선에 온 청나라 사신에게 구명을 요청하는 외교적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부터 이들에겐 고난의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하멜은 전라좌수영에서 하루 170m의 새끼를 꼬았다.
이들이 더는 견디지 못하고 일본으로 탈출했으니 조선에 억류된 지 만 13년 만이었다.
이때의 일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긴 ‘하멜표류기’는 기행문이 아니다. 공식일지다. 밀린 임금을 받아내기 위한 보고서였다.
서양인에 의해 최초로 씌어진 ‘조선견문록’은 ‘지리상의 대발견’의 시기에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1년 뒤 프랑스판이 나왔고 독어판 영어판이 속속 출간됐다.
1692년 62세로 세상을 떠난 하멜은 독신이었다.
조선에 두고 온 아내를 잊지 못해서였다고 하나, 하멜표류기에 그런 말은 없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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