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공주 무령왕릉 발굴

  • 입력 2004년 7월 7일 18시 47분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발굴이 아니라 차라리 도굴(盜掘)이었다….”

1971년 7월 8일 밤. 충남 공주 무령왕릉 발굴 현장.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신원이 밝혀진 백제의 처녀분(處女墳)은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현장은 취재진과 군중이 몰려들어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누군가 사진을 찍는다며 동시(銅匙·청동숟가락)를 부러뜨리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으니.

발굴을 책임지고 있던 김원룡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마음이 급했다. “서둘러야 해!”

장대비가 쏟아지는 장마철이었으나 밤샘작업이 강행됐다.

어디선가 깜박깜박하는 희미한 백열전등을 끌어왔다. 그리고 고물카메라 한 대. 그게 전부였다. 고구마를 캐 자루에 퍼 담듯 12시간 만에 유물들을 쓸어 모았다.

어디서 무슨 유물이 나왔는지 발굴단원들조차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최악이었다.”

29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됐으나 실측도는 물론 최소한의 발굴정황마저 기록되지 않았다. 유물은 발굴과 동시에 고고학적 생명력을 잃어 갔다.

무령왕릉은 수수께끼로 가득 찬 고대 삼국사에 해답의 실마리를 던져줄 고고학의 보고(寶庫)였다. 동아시아 고대사를 여는 ‘블랙박스’였다.

마침내 1500년의 침묵을 깨고 ‘무덤 속 진실’을 전하려는 바로 그 순간, 그 입을 틀어막은 것은 발굴단이었다. “그것은 우리 고고학계의 원죄(原罪)였다!”

25대 무령왕은 웅진시대의 백제를 해양강국으로 다시 일으켜 세운 영주(英主)였다. 무덤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은 그의 죽음을 중국 황제와 대등한 ‘붕(崩)’으로 표기했다. 백제의 자존심이었다.

그의 출생은 엇갈린다. 동성왕의 아들(삼국사기)이라고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개로왕의 동생)의 아들(일본서기)이라고도 전한다.

무령왕릉의 논의를 주도한 것은 일본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무령왕이 안치된 관의 재질이 일본 남부에서만 자라는 ‘금송(金松)’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본서기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서인가. 무령왕릉에는 일본인들의 답사가 줄을 잇는다. ‘도래인(渡來人)의 후손’인 그들에겐 이곳이 귀소 본능을 자극하는 성지(聖地)였던가.

정작 우리에게 백제사는 ‘여백(餘白)’으로 남아 있을 뿐이되!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