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4년 6월 17일 20시 33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이 해묵은(?) 역사의 가정(假定)은 “그때 마침 폭우가 쏟아지지 않았더라면…”이라고 고쳐 묻는다.
먼저, 오스트리아의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그에게 나폴레옹의 패배는 바로 유럽의 패배요, 프랑스혁명의 패배였다.
워털루의 패인을 단지 부하 탓으로 돌리는 츠바이크는 ‘그렇지 않았다면’ 유럽의 역사가 왕정복고(王政復古)로 뒷걸음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단정한다. “위대한 운명의 순간은 언제나 천재를 원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유럽의 민심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프랑스인들은 전쟁에 염증을 느꼈다. “나폴레옹의 모험은 막다른 골목에 서 있었다.”
그가 엘바 섬에서 탈출해 다시 권좌에 앉은 ‘100일 천하’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혁명정신의 화신’은 혁명을 두려워하는 부르주아 계급을 껴안는 우(愚)를 범했다. 국민들의 열정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나폴레옹 전쟁’의 승인(勝因)은 기동력을 앞세운 속전속결이었다. 전광석화와 같은 기습작전이었다.
그러나 파리에서 워털루까지 200여km를 달려온 프랑스군에겐 속전도, 속결도 힘에 부쳤다.
1815년 6월 18일. 마침내 결전의 날이 밝았을 때 땅은 전날 내린 폭우로 진흙탕이 되어있었고 비 온 뒤의 안개는 시야마저 가렸다. 천하무적의 프랑스 포병은 무력했다.
나폴레옹은 땅이 마르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사이 쫓겨 갔던 프로이센군이 되돌아와 영국군과 합류했으니. 시간을 벌었던 웰링턴의 전략은 주효했다. “주력이 깨지지 않으면 이길 수 있다.”
“유능한 장군은 전략을 알고, 훌륭한 장군은 병참을 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군은 날씨를 아는 장군이다”(아이젠하워)라고 했던가.
그러나 웰링턴은 씁쓸했다. “나는 승리한 이 순간에도 패했다는 기분이 든다. 패전 다음으로 가장 슬픈 것은 승전이다….”
그리고 ‘워털루의 신화’는 다시 한번 역사의 승자와 패자를 역전시킨다.
워털루는 웰링턴의 승리를 기념하는 전승지가 아니라, 패자인 나폴레옹을 추억하는 유적지가 되었으니!
이 진정한 영웅에게는 패배조차 빛나는 영광이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