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제2공화국 장면내각 사퇴

  • 입력 2004년 5월 17일 18시 43분


제2공화국 내각제 정권의 수반 장면.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교육자의 길을 가고자 했으나 세상은 그를 그리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정계(政界)의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과적으로 우리 정치사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으니! 그것은 한국정치사의 비극이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55시간 뒤인 5월 18일 정오. 장면 국무총리는 마지막 국무회의를 주재했다. 그리고 성명을 발표한다. “군부 쿠데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내각은 총사퇴한다.”

성명이 언론에 보도될 즈음 ‘군부 쿠데타’는 ‘5·16혁명’으로 둔갑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희열과 좌절을 거의 동시에 경험한 장면 정권. 그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 평가의 핵심은 그가 그 세대 한국 정치인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진지한 민주주의자였다는 것이다.

5·16 이후 장면 정권은 무능과 부패, 그리고 혼란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지만 그 속은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당시 민주당 정권은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있었고,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했다.

DJ의 회고. “미국과 경제지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져 장 총리가 방미를 앞두고 있던 바로 그 찰나에 쿠데타가 일어났다. 5·16 직전에 정국은 안정을 찾고 있었다. 데모도 잦아들었다.”

쿠데타가 없었다면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와 경제개발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을까. 그건 모를 일이다.

다만 한 가지.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신실한 가톨릭 신자요, 양심적인 교육자이며 탁월한 외교관이었고, 권도(權道)를 모르는 정치인이었다’. 그게 바로 그의 한계였다.

‘덕유만사성(德有萬事成).’ 그것은 4·19 이후 난세(亂世)의 정치적 리더십으로는 미흡한 것이었다.

그가 정치적으로 패배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비난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어떤 평가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정치풍토에서 그는 유별난 존재였다. 시인 타고르의 말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자기의 명성이 자신의 진실보다 빛나지 않는 자는 축복이니….”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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