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6년 도쿄 전범재판 시작

  • 입력 2004년 5월 2일 18시 53분


“일본 천황을 전범(戰犯)으로 기소하지 말라.”

1946년 1월 24일. 연합국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는 워싱턴에 극비전문을 띄웠다. “천황을 처벌하라”며 세계 여론이 들끓고 있었고, 워싱턴 역시 그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경계하고자 했다.

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천황의 전쟁범죄에 관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으며, 그를 처벌한다면 일본 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따라 백만 대군의 희생이 예상되는 새로운 전쟁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종전 직후만 해도 “천황제를 폐지하겠다”고 강경했던 맥아더. 그는 왜 이렇게 갑자기 돌아선 것일까.

히로히토(裕仁)가 도쿄의 미국대사관에서 맥아더를 만난 게 그 몇 달 전인 1945년 9월 27일.

35분간 밀담을 가진 뒤 맥아더의 태도는 누그러졌다. 그를 죽이기보다는 손을 잡기로 했다. 소련의 팽창주의를 억지하는 게 급선무였고, 그 방파제인 일본의 재건을 위해 히로히토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1946년 1월 히로히토는 살아있는 신(神)임을 부정하는 ‘천황인간선언’을 발표한다.

전쟁 중 베일에 가려 있던 그가 불현듯 대중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군국주의자들의 꼭두각시이자, 그 희생양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1946년 5월 3일. 마침내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이 열렸으나 히로히토는 기소되지 않았다. 2년 반 동안 심리가 계속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았다. 철저히 비켜갔다.

그러나 정작 태평양전쟁을 끝까지 반대했던 히로타 고키(廣田弘毅) 외무대신 겸 총리는 교수대에 서야 했으니! 오죽하면 재판정에서 “역사는 정의의 편이 아니다”는 탄식이 흘러나왔을까.

전쟁의 총책임자로 지목됐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도 재판에서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법정은 끝내 외면했다.

히틀러, 무솔리니와 함께 2차 세계대전의 3대 전범인 히로히토. 그는 패전 뒤에도 44년을 더 일본을 다스렸고, 천수를 누리다 국민들의 애도 속에 갔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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