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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3월 21일 18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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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은 이렇게 한탄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80년대를, 그 80년대의 어둠을 낳았던 60년대의 정치적 유산을 ‘핥고 있다’. 5·16군사쿠데타의 멍에를, 미완(未完)으로 끝난 4·19혁명의 회한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시효(時效)’를 인정하지 않는 가혹한 채권자인 것이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이 한강을 건넜을 때 장면 총리는 황급히 몸을 피했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할 혜화동 수녀원’에 잠적했다.
내각책임제하에서 국정을 책임진 국무총리의 ‘행방불명’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다. 학생과 시민들이 피 흘려 세운 민주정부가 아니던가. 국민에 대한 배신이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자리를 지켰다. ‘유일한 헌법기관’으로 쿠데타 세력을 상대했다. 그러나 이날 청와대로 찾아온 박정희 일행에 던진 첫마디가 묘했다. “올 것이 왔구나!” 이 발언은 두고두고 논란이 된다.
쿠데타군은 윤 대통령을 회유하기 위해 ‘인조반정(仁祖反正)’을 들먹였다. 광해군(장면 내각)을 폐하고 인조(윤 대통령)를 옹립한다?
뒤 이어 마셜 그린 주한 미국대리대사와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청와대를 방문했다. 처음부터 쿠데타에 반대했던 두 사람은 무력진압을 주장했으나 윤 대통령이 끝내 반대하자 이렇게 경고한다. “각하의 이번 결정으로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군부통치가 계속될 것입니다.”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은 의전상의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윤 보선은 이승만이 누렸던 대통령의 권위에 집착했다. 사사건건 월권을 했다. 장면 내각을 공격했다.
민주당 내 구파와 신파를 대표했던 두 사람. 이들의 대립은 정국혼란과 민심이반으로 이어졌고 갓 피어난 민주주의의 싹이 짓밟히는 빌미가 되고 만다.
장면은 쿠데타를 막지 못한 ‘역사의 죄인’이란 자책 속에서 내내 괴로워하다 세상을 떴다.
반면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던 쿠데타 세력과 10개월을 ‘동거’했다. 1962년 3월 ‘정치정화법’에 항의해 대통령을 사임했으나 하야(下野)는 예정된 것이었다. 물러나지 않으면 쫓겨나야 했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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