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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월 20일 16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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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방스의 웅변가’ 미라보. 할 말과 못할 말을 가리지 않았던 ‘미친 개’는 프랑스 혁명의 영웅이었다. 그는 “전제주의와 특권 계급을 물어뜯는 데 앞장서겠다”며 군중을 선동했으나 정작 자신은 왕실과 뒷거래를 하고 있었음이 사후(死後)에 밝혀졌다.
혁명에는 기회주의자도 있고 음모가도 있다. ‘미친 개’도 있다. 이들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게 또 혁명이다.
근대정치이념의 핵심인 자유와 평등의 사상을 가장 격렬한 방식으로 실험했던 프랑스 대혁명. 피에 굶주린 로베스피에르의 등장은 그 가장 어두운 그늘이다. 1793년 ‘공포정치’가 시작되면서 혁명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는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선 것이 그해 1월이다. 그는 무능했으나 폭군은 아니었다. 그의 마지막 말에는 일말의 진실이 있다. “국민이여, 짐은 죄 없이 죽는다.”
그러나 온건파 지도자인 베르뇨드마저 국왕을 처형하라고 열변을 토했다. 또 그런 그도 결국은 단두대에 서야 했으니 혁명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로노스처럼 ‘자기 자식을 잡아먹었다’.
‘혁명의 서(書)’에서 가장 참혹하게 꺾인 인물은 ‘베르사유의 장미’였다.
사치와 낭비벽으로 국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밀어내기 위한 빌미가 되었다. 그녀는 또 다른 희생양이었다.
혁명세력은 그녀를 성적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로베스피에르는 그녀가 만족할 줄 모르는 ‘자궁의 충동’을 갖고 있다고 몰아붙였다. 남성 공화주의자들은 왕비의 부정(不貞)한 사례를 들어 여성의 정치참여를 도덕적 타락으로 몰고 갔다.
미국의 여성 사학자 린 헌트는 “그것은 남성끼리의 새판 짜기였다. 남성 중심의 혁명, 여성을 정치에서 배제한 절반의 혁명. 이것이 프랑스 혁명에 감추어진 보수성”이라고 말했다.
혁명의 격랑(激浪)이 휩쓸고 간 역사의 뒤안길은 공허하다. 자유, 평등, 박애…. 그것은 단지 ‘레토릭’일 뿐이었던가.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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