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믿음만으로…1521년 로마교황청 루터 파문

  • 입력 2004년 1월 2일 18시 31분


‘루터가 던진 번개는 큰 불길을 일으켰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불을 지피던 농민운동에 기름을 끼얹었다. 교황의 교서를 불태운 그의 행동은 ‘반란의 신호’로 인식되었다.

농민들은 제후들과 격렬히 대립했다. 약탈과 방화, 살인이 잇따랐다. 상황이 악화되자 루터는 결국 영주들의 편에 서게 된다. 그는 잔인한 진압을 주문했다. “농민들을 찌르십시오. 목을 매다십시오.”

1905년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나 친구를 잃은 뒤 수도회에 들어갔던 루터.

종교개혁의 불을 댕긴 것은 그의 ‘95개조 논제’였다. 루터는 “하느님이 교회를 짓는 바로 옆에 마귀는 자신의 제단을 놓는다”며 교회의 면죄부(免罪符) 판매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95개조 논제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에 힘입어 대량으로 인쇄됐고, ‘마치 천사들의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독일과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금속활자가 처음 찍어낸 것이 바로 이 면죄부였으니 그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1521년 루터는 파문당했다.

그는 ‘개혁자’이기보다는 ‘복음주의자’이기를 원했다.

그는 세속 교회의 권위를 성경 위에 올려놓은 로마 가톨릭에 대해 “성서만으로”를 주장했으나, 당시 급진적인 개혁운동에 대해서도 “복음은 오직 양심만을 상대한다”고 선을 그었다.

루터의 종교는 철저히 하느님 중심이었다. 종교개혁의 요체는 ‘세 가지의 오직(Three Solas)’이었다. “성서만으로!” “은혜만으로!” “믿음만으로!”

루터의 비판론자들은 그가 하느님의 나라를 극단적으로 영성화함으로써 지상에서 진실된 하느님의 소명을 저버리고 내면의 세계로 도피했다고 지적한다. 카를 바르트는 “루터는 ‘복음의 내면화’ ‘구원의 사유화’를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일찍이 헤라클레이토스는 “완고한 신앙은 신성화한 질병”이라고 갈파했다.

그것은 세속 교회의 ‘바벨탑’을 쌓았던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나, ‘오직 믿음만으로’ 바벨탑을 세우고자 했던 루터에게나 모두 해당되는 말인지도 모른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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