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글로벌 인사이더] 사과하지 않는 대통령의 뒷모습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3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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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슨 사임 뉴욕타임스 1면
닉슨 사임 뉴욕타임스 1면

정미경 기자
정미경 기자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I’m not a crook).’

1973년 11월 17일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플로리다 기자회견에서 한 말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의 가장 유명한 발언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발언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라기에 앞서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 같은 명 발언과 어깨를 나란히 겨룰 정도로 미국인들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미국 언론은 매년 11월 17일이 되면 이 발언을 기념하는 특집 기사까지 실을 정도다.

그러나 케네디의 발언과 닉슨의 발언은 배경이 완전히 다르다. 케네디의 발언이 희망을 강조한 것이라면 닉슨은 절망 속에서 나온 말이다. 워터게이트 수사가 점점 자신을 조여 오자 자신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해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닉슨은 이 말을 하면서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기꾼이 아니라는 발언은 오히려 사기꾼이라는 이미지만 강화시켰다. 이 발언이 있기 한 달 전 닉슨은 워터게이트 특검을 해고하는 초강수를 뒀고 민심은 그의 곁을 떠났다. 민심이 이미 그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닉슨뿐이었다. 약 9개월 후 닉슨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탄핵당하는 대통령이 될 것인가, 최초의 하야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을 거듭하다 하야의 길을 택했다.
닉슨 사임 워싱턴포스트 1면
닉슨 사임 워싱턴포스트 1면

닉슨은 미국 역사상 가장 나쁜 대통령처럼 여겨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벌어진 1972년 재선 선거에서 닉슨은 60.7%라는 큰 지지를 받으며 37.5%를 얻은 민주당 후보 조지 맥거번을 가볍게 눌렀다

이렇게 잘 나가던 닉슨이 선거가 끝난 지 2년 만에 가장 추악한 대통령이 되어 쫓겨났다. 거짓말을 하며 정당한 사법적 절차를 방해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닉슨은 1974년 8월 8월 사임 연설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사임 연설은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대통령 업무에 매진할 수 없어 사임한다’는 극히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대통령과 모든 시간을 직무에 쏟을 수 있는 의회를 필요로 하고 있다. 국내외적으로 여러 문제에 직면한 지금은 더욱 그렇다. 나의 개인적인 변론을 위해 몇 달씩 싸움을 계속하게 되면 대통령과 의회 모두의 시간과 관심이 거의 모두 빼앗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 낮 12시를 기해 대통령직을 사임하려 한다.”

대통령이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할 것이라고 기대했던 미국 국민들은 마지막까지 배신감을 느꼈다.


▲ 동영상 : 닉슨 사임 연설

닉슨은 하야 결정을 내린 다음 날 백악관을 떠났다. 당시 미국 방송은 백악관을 떠나는 닉슨을 생중계했다. ‘마린 원’이라고 불리는 대통령 헬리콥터가 백악관에서 그와 가족을 태워 앤드류 공군기지로 데려갔다. 여기서 닉슨은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 원을 타고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닉슨으로서는 마지막으로 타는 에어포스 원이었다.

마린원 앞 닉슨 대통령
마린원 앞 닉슨 대통령

마린 원 기내로 들어가기 전 닉슨은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국민을 향해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크게 흔들었다. 과장된 몸짓 때문에 닉슨의 마지막 가는 길은 정말 ‘웃픈(웃기고도 슬픈)’ 모습이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끝까지 거부하고 돌아선 닉슨 대통령.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 후 사저로 복귀한 한국 대통령도 그랬다. 그런 대통령의 뒷모습은 초라했고 동정조차 가지 않았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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