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의 글로벌 인사이더] 여성 롤모델 많은 美 여성, 성 평등 높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13일 11시 30분


코멘트

왼쪽부터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낸시 펠로시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패커드 최고경영자(CEO), 인드라 누이 펩시 CEO. 사진 동아DB
왼쪽부터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낸시 펠로시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패커드 최고경영자(CEO), 인드라 누이 펩시 CEO. 사진 동아DB
정미경 기자
정미경 기자
미국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여성 ‘롤 모델(모범 사례)’이 많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말할 것도 없고 하원의장 출신인 낸시 펠로시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패커드 최고경영자(CEO), 인드라 누이 펩시 CEO 등이 있다. 펠로시는 다섯 명의 자녀를 낳고 40대 중반에 정계에 데뷔해 의회 최고의 여성 지위에 올랐고, 피오리나는 유방암을 이겨내고 지난해 공화당 대선 경선에 뛰어든 집념의 여성이다. 누이는 인도 출신이라는 인종적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10년 넘게 펩시를 이끌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여성 롤모델을 배출했으니 미국의 성 평등 수준은 꽤 높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13년 세계경제포럼(WEF) 조사를 보면 미국의 성 평등 지수는 23위다. 대부분의 북·서유럽 국가뿐 아니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보다 낮다. 같은 해 세계경제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15~64세 미국 여성 중 직장을 가지고 있는 비율은 62.2%로 34개 회원국 중 중간 수준인 16위이다. 미국이 자국의 경제 규모에 비해 여성의 고용 평등 수준이 뒤처질 뿐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74.5%로 남성(67.4%)보다 높다. 500대 기업 신입사원 여성 비율이 41%에 이를 정도로 여풍(女風)이 센 것 같은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걸까. 몇 년 전 미국발(發) ‘알파걸’ 열풍이 세상을 뒤덮지 않았던가.

가장 큰 장애물은 ‘유리천장’이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미국 직장 여성들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통로가 매우 좁다. 미국 법대 졸업생 중 여성은 절반에 가까운 47%에 달하지만 법률회사 파트너까지 오르는 여성은 20%에 불과하다. 연방법원 여성 판사 비율은 23%에 그치고 있다. 의대를 졸업하는 여성도 48%에 달하지만 의대 학장이나 교수에 임명되는 비율은 13%에 불과하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경영대학원(MBA) 졸업생의 37%는 여학생이지만 500대 기업 중 여성CEO는 4%에 불과하다. 기업 3곳 중 1곳은 고위급 경영진에 여성이 한 명도 포함돼 있지 않다. 2014년 매킨지 컨설팅 조사에 따르면 기업 이사회 중 여성의 비율은 미국이 15%로 노르웨이(3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100대 기업 여성 CEO 비율도 유럽이 7%인 데 비해 미국은 2%에 불과하다. 정부 기관과 기업 이사회의 30¤40%를 여성 임원으로 채우는 쿼터제도 유럽에서는 이미 116개국에서 채택할 정도로 일반화됐지만 미국은 해당되지 않는다.

미국 기업인 여성을 위한 비영리단체 캐털리스트가 2012년 포천지 선정 500개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사회에 진출했다 해도 이사회 회장을 맡은 경우는 3.3%에 불과했다. 유리천장은 유색인종 여성들에게 특히 높게 나타나는데 포천지 선정 500개 기업 중 3분의 2 이상 기업이 지난 5년간 이사회에 단 한 명의 유색인종 여성도 포함시키지 않았다.

미국 여성은 ‘피곤’하다.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회적 메커니즘이유럽에 비해 크게 뒤지기 때문이다.

미국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유급 출산휴가가 없다. 다른 복지 선진국들이 출산휴가 때 평균적으로 임금의 38%를 지원해 주는 것과 대조된다. 무급 출산휴가조차 자유롭게 쓰지 못한다. 법으로 정한 기간이 12주(3개월)에 불과해 북유럽과 같은 복지 선진국들의 평균인 57.3주에 훨씬 못 미친다. 그나마 이것도 종업원 50명 이상 기업에만 해당한다. 이 정책이 도입된 것도 1994년에야 제정된 가족의료휴가법에 의해서다.

유럽에서는 1~5세 어린이의 90%가 정부 보조를 받는 보육시설 혜택을 보지만 미국 내 정부 지원 육아시설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머지는 비싼 사립 보육시설에 맡기거나 개인적으로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 또 기혼 여성들이 큰 혜택을 볼 수 있는 재택근무제를 채택하는 기업이나 기관도 20~30%에 불과하다. 그나마 2000년대 말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재택근무제는 더욱 위축됐다.

2014년 워싱턴포스트(1월 14일자)가 지적했듯이 미국은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출산휴가와 같은 복지정책이 잘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성공을 막는 주요 이유다.

미국 기업들이 이처럼 일과 가정을 병행하는 여성을 위한 지원에 인색한 것은 수익 지향적 조직 문화와 관련이 있다. 성과주의 문화가 지배적인 미국 기업은 여성 지원책을 마련하는 것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보기 때문이다.

힐러리가 국무장관 재직 때 국무부 정책국장이라는 ‘넘버3’ 요직에 앤마리 슬로터라는 여성이 있었다. 그는 장래 국무장관 감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사춘기 자녀들을 돌보기 위해 2011년 국무부 최초 여성 정책국장 자리를 그만두고 프린스턴대 교수로 돌아갔다. 주변에서, 특히 젊은 여성들로부터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성공한 여성 롤모델이 가정 때문에 일을 포기한다면 미국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겠느냐’는 질타였다. 그 후 슬로터 교수는 한 잡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가정과 직장에서 동시에 유능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 있는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그의 얘기다.

“실적을 내기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는 직원을 좋아하는 미국 직장이 학부모 모임에 참석한다며 오후 3시에 퇴근하겠다는 여성 직원을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가정을 택하는 여성을 실패자로 보는 주변 시선 때문에 우울증에 빠지기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미국에서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 도달하려면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여성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감 부족, 성공 의지 결여를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다. 여성 개인의 노력과 의지로 성공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샌드버그 COO.
샌드버그 COO.

이 같은 메시지를 설파하는 대표적인 인사로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가 있다. 한국에도 번역된 그의 저서 ‘린 인’을 보면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야망의 격차’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외부 요인을 탓하기에 앞서 여성 내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 진출과 성공을 위해서는 직장의 이해, 국가적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것은 2차적 과제이고 여성이 각성해서 뛰어드는 것(Lean In)이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성공 의지와 노력 모두 갖춘 여성이 보육과 가정 문제로 좌절할 경우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은 없다.

개인적으로 미국 유학과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이 나라는 민주주의 제도, 사회적 풍요, 민도(民度) 등에서 어느 것 하나 뒤지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유독 여성 문제, 특히 일과 가정의 양립을 도와주는 제도 마련이나 사회적 인식은 뒤쳐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잘 하면 내 덕, 못해도 내 탓’이라는 미국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여성 자신이 모든 것을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쪽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 8년 동안 여성정책, 보육정책에서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 분야에 관심도 없고 정책 의지도 없을 가능성이 크다. 미국의 정책은 매우 늦은 속도로 변한다. 우리나라는 많은 분야에서 미국 정책을 롤모델로 삼아 발전했지만 여성정책, 보육정책은 미국의 영향권 내에 있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