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세상에 반영웅이 뜬다[글로벌 이슈/구가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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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조커’ 복장을 한 남성(가운데)이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번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에는 조커가 상징처럼 등장하고 있다. 산티아고=AP 뉴시스
1일 칠레 산티아고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서 ‘조커’ 복장을 한 남성(가운데)이 칠레 원주민 마푸체족의 깃발을 흔들고 있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번지고 있는 반정부 시위에는 조커가 상징처럼 등장하고 있다. 산티아고=AP 뉴시스
구가인 국제부 차장
구가인 국제부 차장
홍콩, 레바논, 이라크, 칠레, 스페인…. 최근 세계 각국의 반(反)정부 시위에는 어김없이 ‘조커’가 등장한다. 조커는 80년 전 DC코믹스 만화에서 탄생한 영웅 배트맨의 숙적. 섬뜩한 미소로 광기와 악을 상징했지만 이제 불평등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반정부 시위의 아이콘으로 바뀌는 분위기다.

3일 미국 CNN은 왜 각국 시위에서 조커가 인기를 끄는지를 분석했다. 독일 할레비텐베르크 마르틴루터대의 안드레 비어 연구원은 “시위 참가자들이 조커 분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나는 지금 가장 밑바닥에 있지만 권력자들은 앞으로 하려는 일에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실제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 시위에 참가한 거리 예술가는 “우리가 바로 조커다. 베이루트는 새로운 고담시”라고 말했다. 고담시는 부패, 부조리함, 혼돈이 뒤섞인 공간이다. 레바논에서는 지난달 정부가 메신저용 앱인 ‘와츠앱’에 하루 20센트의 세금을 부과하겠다고 발표한 뒤 양극화와 민생고 등에 항의하는 시위가 2주 이상 계속되고 있다.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이 시위를 촉발한 칠레 산티아고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시위대는 조커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말한다. 조커 분장을 하고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은 “조커는 오해받고 있고, 상처받고 버림받은 인물”이라며 “사회적 특권층에 속하지 못한 대다수 칠레인 역시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홍콩의 반중 시위대는 조커 가면을 가장 먼저 이용했다. 지난달 5일 홍콩 당국이 시위대의 복면 착용을 금지하자 이때부터 많은 시민이 시대에 맞지 않는 법안을 제정한 홍콩 당국에 대한 조롱의 의미로 조커 가면을 쓰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6월 9일 시작된 반중 시위는 5일로 벌써 150일을 맞았고 조만간 진정될 기미도 안 보인다.

시위대가 ‘정의의 사도’가 아닌 ‘미친 악당’, 반영웅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내세우는 지금의 현상은 이례적이다. 조커 이전 시위의 단골 가면이었던 ‘가이 포크스’만 해도 영화 ‘브이 포 벤데타’ 등을 통해 자유와 신념의 상징으로 부각됐다.

시위대가 조커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현상 이면에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고담시 같은 부조리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끼는 이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을 비판한 책을 유통했다는 이유로 홍콩 퉁러완 서점 관계자의 행방이 2015년부터 묘연한 일까지 발생하자 홍콩을 고담시로 느끼는 시민들이 늘었다. 홍콩의 자치권이 중국의 뜻에 따라 언제라도 깨질 수 있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달 1일부터 수도 바그다드 등에서 이어지는 이라크 젊은이들의 시위는 민생고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이라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산유량 2위 국가지만 정치권의 부패가 원인이 됐다. 젊은이들은 “그 많은 석유는 어디로 가느냐”고 성토한다.

영화 ‘조커’를 만든 토드 필립스 감독은 작품을 통해 “공감 능력, 더 정확히는 현실에서도 쉽게 목격할 수 있는 공감 능력의 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영화 속 약자에 대한 기득권의 공감 결여는 조커를 낳았을 뿐 아니라 대중이 조커를 영웅으로 추앙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이 같은 공감 결여는 현실에서도 진행 중이다. 칠레 시위 확산으로 비상사태가 선포됐던 지난달 18일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가족과 외식하는 모습이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 당시 대변인은 “누구나 식사할 권리가 있다”고 해명했다. 이후 공개된 식사 당시 녹취파일에서는 대통령 부인이 시위대를 외계인에 비유한 사실도 드러나 논란이 됐다.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도 시위 초 젊은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며 강경 진압을 해 시민의 반발을 부추겼다. 여기에 중국 정부의 강경 대응이 더해지며 시위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됐다. 결국 암담한 현실에 대한 대중의 분노는 사회 기득권층의 공감 결여를 통해 더 증폭된다. 이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한 더 많은 조커가 등장할 것이다. 미친 광대 조커가 약자와 연대의 상징으로 재부상한 이유다.

구가인 국제부 차장 comedy9@donga.com
#조커#반정부 시위#반중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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