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아직 트럼프가 유리하다[글로벌 이슈/하정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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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탄핵 위기에도 백인 노동자 계층(WWC)의 지지를 받고 있다. 민주당이 이들을 끌어안지 못하면 내년 대선에서 또 패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탄핵 위기에도 백인 노동자 계층(WWC)의 지지를 받고 있다. 민주당이 이들을 끌어안지 못하면 내년 대선에서 또 패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 출처 픽사베이
하정민 국제부 차장
하정민 국제부 차장
내년 11월 3일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탄핵 위기를 맞았다. 그렇다고 탄핵 정국에서 꼭 민주당이 승리할까. 또 ‘제2의 트럼프’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까. 친(親)민주당 성향의 백인 지식인 저자 두 명의 책을 보고 아니라는 생각을 굳혔다.

페미니스트 법학자인 조앤 윌리엄스 미 헤이스팅스 소재 캘리포니아대 교수(67)는 ‘화이트워킹클래스(WWC·White Working Class)’에서 최고 학력 백인들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나머지 백인들을 너무 모른다고 지적했다. ‘먹물’ 백인이 보는 ‘기타’는 정부 식량 보조에 의존하는 극빈층, 레드넥이나 힐빌리로 불리는 저학력·저소득층 노동자 정도가 고작이다.

WWC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경찰, 간호사, 비서, 영업직 등인 이들은 가방끈이 짧을지언정 저소득층은 결코 아니다. 연 소득은 4만1000달러(약 4920만 원)에서 13만2000달러(약 1억5840만 원) 사이. 미슐랭 식당에서 최고급 와인을 마신 적도, 자신의 주(州) 밖을 벗어난 적도 거의 없다. 라틴어와 프랑스어도 잘 모르고 양성평등과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도 적다. 그래도 성실히 살면서 세금을 꼬박꼬박 냈다. 이들의 바람은 현재의 직업을 최대한 오랫동안 영위하는 것이다.

이들이 보기에 뉴욕,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등 대도시의 고학력 백인들은 위선의 결정체다. 늘 정치적 올바름, 불평등 해소, 난민 보호를 외치는데 정작 본인은 어떤 희생과 헌신을 했는지 도통 알 수 없다. 유기농 음식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국어로 치면 직조, 핍진성, 형해화 같은 말만 쓰는 것도 볼썽사납다. 특히 소득이 더 적은 대학강사, 시민단체 직원, 프리랜서 작가 등이 학벌과 문화적 취향을 앞세워 자신들을 깔보는 것에 분노한다.

진보 성향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의 리처드 리브스 선임연구원(50)은 ‘20 vs 80의 사회’에서 최상위 1% 부자가 아닌 석·박사 학위를 지닌 전문직 종사자들을 양극화 주범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동문 자녀 우대 같은 불공정한 대학 입학 절차, 알음알음으로 이뤄지는 인턴 분배 등을 통해 계층 이동을 막아버렸다. 영국 태생인 그는 발음만으로도 계급이 드러나는 사회가 싫어 미국에 귀화했다. 군주가 있는 옛 조국보다 겉으로는 능력 본위 사회임을 자랑하는 새 나라의 심각한 불평등에 놀랐다. 자신과 주변의 ‘먹물’들부터 달라져야 한다며 이 책을 썼다.

굳이 비유하자면 트럼프 대통령은 ‘돈 많은 WWC’다. 패스트푸드를 즐기고 ‘그레이트(Great)’ ‘굿 잡(Good job)’ 같은 쉬운 말만 한다. 그래서 WWC들이 좋아한다. 이들에게 부유세 도입, 탄소 배출 제로(0) 등을 외치는 민주당의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하원의원 등은 ‘멀어도 너무 먼 당신’이다. 이들은 늘 유리천장 타파를 외치는데 WWC는 그 이유를 모른다. 천장 근처에 간 적이 없어서.

WWC는 경합주 판세를 좌우하는 대선의 핵심 변수이기도 하다. 538명의 선거인단 중 캘리포니아(55명), 텍사스(38명), 뉴욕(29명)은 사실상 승자가 정해져 있다. 트럼프가 성 평등론자로 변한들 캘리포니아와 뉴욕에선 공화당 승리 확률이 낮다. 워런이 국경장벽을 지어도 텍사스 표심 역시 민주당을 거부할 것이다. 4년 전처럼 플로리다(29명), 펜실베이니아(20명), 오하이오(18명), 미시간(16명), 위스콘신(10명) 5개 주의 선거인단 93명이 또 대통령을 결정할 가능성이 높다. 이 중 플로리다를 제외한 나머지 4개 주, 즉 쇠락한 공업지대(러스트 벨트)에는 WWC가 넘쳐난다. 위스콘신주 밀워키에 사는 은퇴 기술자 앨런 빙겐하이머 씨(71)는 탄핵 조사가 본격화한 지난달 27일 로이터에 “민주당은 완전히 미쳤다”고 했다.

아직은 내년 대선 승자를 알 수 없다. 다만 민주당이 또 패한다면 WWC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탓이 클 것이다. 윌리엄스 교수의 파이낸셜타임스(FT)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때로 여성을 돕는 가장 좋은 방법은 성별 문제를 벗어나는 거다. 그러니 민주당 대선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에 이은 또 다른 여성을 뽑진 말자. 미국 여성에게 가장 필요한 건 트럼프 연임 저지 아닌가.”

하정민 국제부 차장 dew@donga.com
#도널드 트럼프#트럼프 탄핵#백인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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