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 보육 현장을 가다]<5·끝> ‘워킹 대디’의 천국… 덴마크 레고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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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잘 놀아야 레고 직원”… 아빠에게 육아휴직을 許하라

“육아휴직 좋아요” 덴마크 빌룬트의 레고 본사에 있는 ‘하얀색 방’에서 워킹 대디인 크리스티안 하우게 씨(왼쪽)와 로아르 루데 트랑베크 씨가 마주 보며 웃고 있다. 하우게 씨는 최근 여자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낳은 뒤 신청한 12주 동안의 유급휴직을 끝내고 업무에 복귀했다. 트랑베크 씨는 12월부터 육아휴직을 할 예정이다. 빌룬트=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육아휴직 좋아요” 덴마크 빌룬트의 레고 본사에 있는 ‘하얀색 방’에서 워킹 대디인 크리스티안 하우게 씨(왼쪽)와 로아르 루데 트랑베크 씨가 마주 보며 웃고 있다. 하우게 씨는 최근 여자친구가 자신의 아이를 낳은 뒤 신청한 12주 동안의 유급휴직을 끝내고 업무에 복귀했다. 트랑베크 씨는 12월부터 육아휴직을 할 예정이다. 빌룬트=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전 세계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 레고(LEGO)는 덴마크어로 잘 놀다(play-well)라는 뜻이다. 이에 걸맞게 레고의 직원들은 ‘아이와 잘 노는 아빠와 엄마’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고, 이를 제품 개발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덴마크 빌룬트의 레고 본사에서 일하는 로아르 루데 트랑베크 씨(31)는 두 명의 아들을 둔 ‘워킹 대디(Working Daddy)’다. 올해 2월 둘째 아들 레안데르가 태어나자 그는 2주간 출산휴가를 쓴 뒤 업무에 복귀했다. 덴마크 기업 대부분은 부모 모두에게 출산 직후 2주간 유급휴가를 보장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트랑베크 씨는 아들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하는 12월부터는 육아휴직을 할 계획이다. 이 기간을 택한 것은 병원에 다니는 여자친구의 육아휴직이 이때 끝나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로부터 ‘엄마’ 역할을 물려받은 그는 집에서 혼자 아기를 돌본다. 12주간 회사에 나가지 않지만 월급 전액을 받기 때문에 살림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트랑베크 씨는 “아이가 기고 걷기 시작하는 모든 순간을 드디어 함께할 수 있게 됐다”며 기뻐했다. 지난해 3월부터 시작된 레고 본사의 ‘아빠를 위한 유연한 육아휴직 제도’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 출산 후 12주를 쪼개 쉬는 ‘워킹 대디’


새 제도에 따르면 레고 본사에서 일하는 아빠 직원은 출산 후 1년 내에 12주를 쉴 수 있다. 월급 전액은 회사에서 보장한다. 트랑베크 씨처럼 동거하는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키우는 아빠라도 상관없다.

북유럽 국가인 덴마크는 기본적으로 출산 및 보육에 대한 정부 지원이 탄탄하다. 일하는 엄마는 출산 전 12주간 100% 유급으로 쉬며 출산한 뒤에는 엄마 아빠 모두 총 52주(1년)를 소득의 90%를 받고 쉴 수 있다. 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정부의 몫이다. 겉보기에는 회사의 도움 없이 정부 지원으로만 육아하는 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실제 사정은 다르다. 물가가 비싼 덴마크에서는 월급의 90%를 받는다 해도 월세와 차량 유지비 등 기본 생활비와 각종 세금을 내고 나면 가계를 운영하는 게 빠듯하다. 그래서 덴마크의 일하는 아빠들은 출산 직후 2주간의 유급 휴가와 소득의 90%를 받고 쉬는 육아휴직이 보장되지만 이를 활용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난 직후에는 수유(授乳)를 비롯해 엄마가 해야 할 몫이 커서 아빠가 쉬더라도 집에서 도울 일이 별로 없다는 점도 작용했다.

레고의 워킹 대디들도 마찬가지였다. 레고 본사는 아빠 직원들이 12주간의 유급휴직을 쓸 수 있는 기간을 출산 후 6개월로 제한했었다. 그래서 ‘무늬만 혜택’이라는 지적도 많았다.

트랑베크 씨의 경우 제도가 바뀌기 전인 2010년 1월, 첫째 아들인 루드비가 태어나자 2주간 출산휴가를 썼다. 하지만 6개월 안에 12주간의 육아휴직을 쓰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는 “쉬더라도 아기가 너무 어려 기저귀를 갈아주거나 청소를 하는 것 외에 도움이 되는 일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레고는 워킹 대디들을 위한 보육정책을 바꿨다. 지난해 3월부터 12주 유급휴직을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린 데다 정부 지원이 미치지 않는 ‘나머지 10%’를 회사에서 보전해 주기로 한 것이다. 이 제도의 특징은 본인의 상황이나 근무일정에 맞게 기간을 쪼개 쉴 수 있다는 점이다. 제도가 바뀐 후 1년간 25명이 새 제도의 혜택을 누렸다.

최근 둘째가 태어나 육아휴직을 쓰고 돌아온 전시관 담당 직원 크리스티안 하우게 씨는 새 제도 덕분에 가족계획을 수정했다. 7년간 사귄 여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두 아이를 둔 하우게 씨는 셋째를 갖기로 마음먹었다. “엄마의 육아휴직이 끝날 때쯤 아빠가 육아휴직을 이어서 쓰면 아이가 어린이집에 갈 때까지 육아 공백은 생기지 않는다”며 “셋째를 가져도 무리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 스트레스 없는 직장 위해…


레고 본사는 지난해부터 ‘일과 삶의 조화(work-life balance)’를 중점 전략과제로 세웠다.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는 직장을 만드는 게 양성(兩性) 평등만큼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빠를 위한 유연한 육아휴직 제도’는 이런 고민에서 출발했다. 장난감을 만드는 회사 직원이 훌륭한 아빠가 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이 회사 인사담당 이사인 카트리네 키르크 무프 씨에 따르면 육아휴직제를 바꾸기 위해 추가로 드는 비용은 거의 없었다. 실제로 트랑베크 씨와 하우게 씨가 육아휴직을 썼을 때 레고 본사는 대체 인력을 고용하지 않았다. 생산직을 제외한 사무직이나 직급 높은 사원들은 대체 인력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아빠 직원들은 휴직을 쓰기 전 직무계획에 관해 상사와 충분한 협의를 거쳤다. 관련 부서의 다른 직원들도 조금씩 일을 분담했다. 그 결과 업무 공백 때문에 내부 불만이 보고된 사례는 거의 없었다.

무프 이사는 이를 “직원이 회사에 대해 충성심을 갖는 만큼 회사도 직원에게 충성심을 갖고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사내에서도 아빠의 육아휴직을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한 연수기간’으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는 “추가 비용 없이 회사는 직원들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었다”며 “워킹 대디는 자녀의 첫 1년을 함께 보내며 복귀 후 창의적인 사고로 근무에 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레고 본사에는 아이들을 위한 하얀색 방(white room)이 있다. 흰색 도화지처럼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20평 남짓 되는 공간을 오직 흰색 벽지와 의자, 책상으로 꾸였다. 여기서 직원 자녀들은 원할 때마다 언제든 시간을 보내고 부모들의 사무실에 방문할 수 있다. 이처럼 레고 본사는 근무에 방해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녀를 직장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했다. 무프 이사는 이날도 “딸과 함께 (회사에) 오려 했는데 집에서 레고 블록을 갖고 놀겠다고 해서 데리고 오지 못했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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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친화 기업’ 레고


레고 본사 직원들을 위한 휴식 공간. 직원뿐만 아니라 직원의 자녀들도 원하면 언제든 이곳에서 쉴 수 있다. 안데르스 수네 베르 씨 제공
레고 본사 직원들을 위한 휴식 공간. 직원뿐만 아니라 직원의 자녀들도 원하면 언제든 이곳에서 쉴 수 있다. 안데르스 수네 베르 씨 제공
세계적인 완구기업 레고는 지난 3년간 ‘젠더(gender) 다양성’을 중점 사업으로 내세우며 여성 친화적인 기업을 위해 힘써 왔다. 저(低)출산 문제를 겪고 있는 덴마크에서 육아를 담당하는 워킹맘에 대한 지원이 국가 경쟁력으로 직결된다는 인식이 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를 위해 요르겐 비 크누스토르프 최고경영자(CEO)까지 나섰다. 그는 올해 초 “여성 지도자뿐만 아니라 더욱 다양한 문화적인 배경을 갖고 있는 임원을 뽑도록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여성 임원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레고그룹은 우선 여성들에 대한 대우 개선에 주력하고 있다. 여직원이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쓸 경우 무조건 대체 인력을 고용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육아휴직을 하는 워킹 대디들이 휴직하기 전에 업무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여성 임원을 회사 외부에서 수혈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그 결과 2010년 레고그룹에서 이사급 이상 관리직으로 승진하는 여직원 비율은 목표(25%)를 훨씬 뛰어넘어 32%까지 높아졌다. 그 전까지 관리직 이상 여성 임원의 비율은 15%(2008년), 17%(2009년)에 머물렀다. 현재 레고그룹에서 근무하는 직원 1만790명 중 여성 직원의 비율은 47.4%에 이른다.

미국 코네티컷 주 엔필드에 있는 레고그룹 미국지사는 ‘여성 친화적인 기업’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여성 직원이 불임 치료를 받을 경우 1인당 10만 달러(약 1억1262만 원)에 이르는 비용까지 회사가 지원하고 있다. 이 회사의 여직원들은 13주까지 유급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데 육아휴직을 쓰고 난 후 최대 한 달간 업무에 적응할 수 있도록 근무시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업무를 위해 대학원을 다닐 때는 학비 전액을 지원한다.

그 결과 직원 1768명 가운데 관리직 여성의 비율이 44%를 차지하고 고액연봉자 가운데 여성의 비율도 49%나 됐다. 레고의 미국 지사는 6년 연속 미 워킹머더지가 선정하는 ‘여성이 가장 일하기 좋은 100대 회사’에 올랐다.

빌룬트=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기업#보건복지#덴마크#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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