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전망대]다시 빛보는 ‘경제기획원 DNA’

  • 입력 2009년 3월 16일 02시 52분


2002년 1월 사실상 임기 마지막 해를 맞은 김대중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동북아 허브 구상’을 발표한 이튿날 오후.

박병원 당시 재정경제부 경제정책국장(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은 정부과천청사 사무실에서 종이에 뭔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병원 영리화’ ‘외국인 학교’ 같은 단어들이 얼핏 보였다. 기자의 질문에 그는 “대통령이 얘기한 동북아 허브를 ‘지렛대’로 삼아 그간 기회가 안 돼 추진하지 못했던 정책 중 꼭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의료, 교육을 ‘서비스 산업’으로 보고 규제완화를 통해 경쟁력을 끌어올리려는 정책이 2000년대 들어 처음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박 국장 혼자만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박정희 정부 때부터 거시경제 정책을 총괄해 온 ‘EPB(경제기획원을 뜻하는 Economic Planning Board의 머리글자)’ 출신 관료들은 자유시장경제의 신봉자들이었다. 1994년 정부조직 개편으로 EPB는 사라졌지만 이들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언젠가 꼭 추진해야 할 정책 리스트를 ‘족보(族譜)’처럼 후배들에게 물려줬다.

이 중 대표적 아이템이 병원과 교육기관의 영리화였고, EPB 직계인 박 국장이 적절한 기회에 현실화한 것이다. 이후 재경부는 관계부처와 좌파 시민단체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제자유구역에 외국병원, 외국인 학교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수립했다.

경제정책의 좌편향이 심해진 노무현 정부 때도 EPB 출신들은 기회만 되면 전통을 이으려고 시도했다. 2006년 12월 재경부가 발표한 ‘서비스업 경쟁력 강화 종합대책’에는 병원, 의원들을 프랜차이즈화하고 그 본부를 ‘병원주식회사’ 형태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포함됐다.

정통 EPB맨인 조원동 당시 경제정책국장(현 국무조정실 사무차장)은 “직접 영리화가 어렵다면 간접적으로라도 추진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관계부처와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관련법 개정은 무산됐다.

그리고 2009년. 이명박 정부 2년차를 맞아 기획재정부는 병원, 고등교육 기관의 영리화를 골자로 하는 서비스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EPB의 아이디어가 다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런 정책의 추진은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성장동력 약화, 일자리 감소를 겪는 한국 경제에 꼭 필요하다는 데 많은 전문가가 동의한다.

2월 취임 직후 의료, 교육 분야의 규제완화 필요성을 역설한 윤증현 재정부 장관은 연이어 발언 강도를 높이고 있다. 공교롭게도 경제 관료의 다른 한 축을 이뤄온 모피아(옛 재무부를 뜻하는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의 ‘큰 형님’ 격인 윤 장관이 EPB의 유산(遺産)을 현실화하는 총대를 멘 셈이다.

윤 장관이 금융감독위원장 시절 18년을 끌던 생명보험회사 상장 문제를 해결할 때 보여줬던 뚝심을 한국 경제를 위해 다시 한 번 발휘하길 기대해 본다.

박중현 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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