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수임료 받고 대충변론… 前官이 만사형통이라는 건 환상”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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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관예우, 반칙이고 범죄입니다]<下>부실 변론에 눈물짓는 의뢰인들
착수금 1500만원 냈는데 벌금 36억… 변호사 바꿨더니 2심 선고유예
사건기록 제대로 검토 안하고 후배 변호사에 재판 맡기기도
법무부-변협 신고센터 운영… “불법 인식 갖고 적극 신고해야”

3, 4년 전 세금계산서 허위 발행 혐의(조세범처벌법 위반)로 재판에 넘겨진 건설업체 대표 A 씨는 법원장 출신 전관 변호사를 착수금 1500만 원에 선임했다. 그런데 1심에서 벌금 36억 원을 선고받았다. 형이 그대로 확정되면 벌금을 낼 돈이 없어 노역장에 유치될 처지였다. 2심에선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출신으로 변호사를 바꿨는데,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A 씨는 “전관 변호사는 수임료가 적다고 생각해서인지 기록 검토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재판에 신경을 안 쓰는 느낌이었다. 전관을 선임하면 ‘만사형통’이라는 건 환상”이라고 말했다.

전관예우를 기대하고 값비싼 수임료를 지불한 의뢰인들이 부실 변론으로 고통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전관’이란 타이틀에만 기대 제대로 된 법률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의뢰인들뿐만 아니라 다른 변호사들에게서도 나오고 있다.

○ 전관 선임 독(毒) 될 수도


판사나 검사 출신이 아닌 B 변호사는 횡령 혐의로 기소돼 항소심을 준비 중인 금융권 종사자 C 씨와 상담을 했다. 수임료가 1500만 원 안팎이라고 하자 C 씨는 “1심에서 대형 로펌 소속 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600만 원밖에 안 들었다”고 말했다. B 변호사는 “1심 기록을 살펴보니 변호인이 사건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게 눈에 띄었다. 전관 변호사가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사건이라고 보고 수임료를 적게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명예훼손으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피고 D 씨. 고민을 거듭해 서울 지역 법원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해 착수금 2000만 원을 건넸다. 전관의 영향력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2000만 원을 배상하라’는 패소 판결이었다. 실망한 D 씨는 2심에서 로스쿨 출신 변호사를 500만 원에 선임했다. 이 변호사는 원고를 여러 번 찾아가 설득한 끝에 소 취하를 끌어냈다. D 씨는 한 푼도 배상하지 않게 됐다.

고위직을 지낸 전관 변호사 상당수가 사건 기록을 직접 검토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조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의뢰인을 상담할 때는 ‘얼굴 마담’으로 나서지만 기록 정리는 직접 하지 않고 후배 변호사에게 방향 정도만 알려주고 시킨다는 것이다. 부장판사 출신 E 변호사는 “소송에서 이기려면 변론의 방향을 잘 짚는 게 중요하다. 나는 그런 역할을 한다”며 “현장에 가서 세세한 증거를 수집하고 논리적 결함을 찾아내는 건 아래 변호사들이 한다”고 설명했다.

전관 변호사가 사건 의뢰인에게 로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다 적발된 경우도 있다. 부장판사 출신 한모 변호사는 의뢰인으로부터 ‘대법관 양복 값과 휴가비’ 명목으로 800만 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지난해 10월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제명당했다. 앞서 한 변호사는 2017년 5월 브로커에게 알선료를 주고 사건을 수임한 혐의로 기소돼 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 법조계 종사자들, 전관 영향력 높게 평가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계 종사자가 일반 국민보다 전관 변호사의 영향력을 더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10월 대법원 사법발전위원회가 고려대에 의뢰해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 ‘전관예우가 실제 존재한다’고 답한 일반 국민은 41.9%였다. 법조계 종사자는 55.1%로 13.2%포인트 높았다. ‘어떤 조건에서 전관 변호사 선임을 권고할 것이냐’란 질문엔 법조계 종사자의 43.6%가 ‘비슷한 조건이라면 선임’, 20.5%가 ‘돈이 더 들더라도 선임’이라고 답했다. 같은 답변을 한 일반 국민은 각각 36.3%, 22.3%였다.

또 ‘전관 변호사를 선임하는 이유’에 대해 법조계 종사자는 76.5%가 ‘전관의 영향력을 이용해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변했다. 일반 국민은 44.4%가 같은 응답을 했다. 한 법조계 인사는 “전관예우의 은밀한 작동 원리를 지켜본 내부자들이 일반 국민보다 전관의 영향력을 더 선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난달 기준 전체 개업 변호사 2만1807명 중 판사나 검사 등 공직 경력이 있는 전관 변호사는 2892명으로 13.3%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난해 변호사 1인당 평균 사건 수임 건수는 전관이 비전관의 3배가량 됐다. 전관 변호사가 검찰과 법원에 은밀하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건 의뢰인들의 기대심리 때문이다. 그래서 검찰 수사 단계에선 검사 출신 변호사, 재판 단계에선 심급 순서대로 ‘평판사나 부장판사→법원장→대법관 출신 변호사’를 찾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 “전관예우는 불법…적극 신고해야”

전관과 현직 판검사의 부적절한 유착은 고액 수임을 유발해 법률시장을 혼탁하게 만든다. 명백한 반칙이고 범죄다. 현행 변호사법 30조는 ‘법률사건 수임을 위해 재판이나 수사업무에 종사하는 공무원과의 연고 등 사적인 관계를 드러내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선전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현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은 “일종의 사법 불신, 끼리끼리 봐주기, 공정하지 않다는 믿음이 일반화되면서 전관예우 선호가 굳어졌다. 전관들 책임이 크다”며 “시민들도 전관예우가 반칙이고 불법이라는 인식을 갖고 전관 비리를 용감하게 신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법무부는 2011년 5월, 대한변협은 2015년 9월부터 전관 비리 신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신고 대상은 △사건에 관여하지 않고 변호사 도장만 날인하면서 고액의 수임료를 받는 행위 △변호인 선임서 또는 위임장 없이 사건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 △수임 제한 위반 행위 등이다.

황형준 constant25@donga.com·전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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