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선 대기자의 人]“한일관계 회복기미… 그래도 더 개운하게 떠날 수 있었으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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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대사로 옮기는 벳쇼 고로 日대사

벳쇼 고로 대사는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한글 서예를 열심히 배웠다. 3년 반 동안 지도해주신 선생님이 작품으로 인정한 것은 5개. 벳쇼 대사가 서울 성북구 삼청동 대사관저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벳쇼 고로 대사는 한국에 근무하는 동안 한글 서예를 열심히 배웠다. 3년 반 동안 지도해주신 선생님이 작품으로 인정한 것은 5개. 벳쇼 대사가 서울 성북구 삼청동 대사관저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심규선 대기자
심규선 대기자
5월 중순의 어느 날, 서울의 한 호텔에서 10월에 열리는 한일축제한마당 행사를 준비하는 모임이 있었다. 벳쇼 고로(別所浩郞) 주한 일본대사도 참석했다. 그는 축제의 골격을 정하는 실행위원들에게 “12회째인 이 행사가 올해도 성공할 수 있도록 힘써 달라. 나도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물었다. “10월까지도 대사로 있는가.”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8월 16일이 되면 나는 최장수 주한 일본대사가 된다.” 기자는 그 자리에서 “8월 16일 조금 지나서 인터뷰를 하자”고 요청했고, 그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유엔대사로 발령받아 22일 미국 뉴욕으로 떠난다. 18대 대사였던 그의 재임 기간은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대사의 3년 10개월(1977년 7월∼1981년 5월) 다음으로 긴 3년 8개월. 11일 그를 서울 삼청동 대사관저에서 만났다. 한일관계가 나빴던 기간으로 치자면 그가 최장수 대사일 것이다. 우리 외교부가 대사를 청사로 불러 항의하는 ‘초치’라는 것도 여덟 번이나 경험했다.

―부임할 때 이렇게 오래 있으리라 생각한 적은 있나.

“올 때(2012년 10월) 어느 정도 할지, 그런 걸 생각했던 적은 없다. 다만 2015년이라는 해에 대해서는 의식하고 있었다.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여서. 2015년이 좋은 해가 될지, 거꾸로 힘든 해가 될지, 그걸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은 있었다.”

―후임 대사가 오기도 전에 떠나는 것은 한국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지금 일본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멤버여서 유엔 쪽도 오래 비워 둘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한국도 너무 오래 비워 둘 수는 없기에 양쪽을 조금씩 비우게 (타협을 하게) 된 것 같다.”

―올 때와 떠날 때의 양국 관계를 평가하자면….

“올 때 상당히 어렵다는 말을 여러 사람으로부터 들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가장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큰 흐름으로 본다면 나는 일한 관계는 진전돼 왔다고 생각한다. 2015년이라는 의미 있는 해를 지나면서 양국 정부가 앞을 향해 노력하기로 합의를 했다는 점에서는 지금부터는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그는 한국 재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주저 없이 ‘2015년 6월 22일의 행사’를 꼽았다.

“서울과 도쿄에서 같은 날 양쪽 수뇌가 수교 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하나였던 병풍의 반쪽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나는 그때까지 어려웠던 양국 관계에 하나의 전기가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감을 했다.”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는 그해 11월 2일 서울에서 취임 후 첫 양자 정상회담을 했고, 12월 28일에는 최대의 현안이었던 군 위안부 문제에도 합의했다. 그러나 그가 긍정적인 예감을 하기까지에는 부임 이후 32개월이나 걸렸다. 이날 이전에는 “도대체 일본과 한국이 왜 친하게 지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도 있다. 그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다”고까지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대사로서 너무 답답하다’는 고백으로 들렸다.

―한국과 일본이 친하게 지내야 할 이유는 발견했나.

“그 질문에 상당히 명확하게 대답한 사람이 있었다. 일본 사람도, 한국 사람도 아니다. 유럽연합(EU)의 외무대신으로 불리는 페데리카 모게리니였다. 그녀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2015년 5월) 이런 스피치를 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EU 내부는 상호 간 불신이 심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상호 간의 공통 이익을 찾았다. 공통의 이익을 실현시켰을 때 신뢰 관계가 태어났다.’ 나도 역시 ‘그렇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양국이 공통 이익을 실현한 예가 있나.

“2002년 월드컵이 있다. 처음에는 유치 경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느냐 지느냐의 세계였다. 그러나 제3국의 제안이긴 했지만 양국이 공동 개최를 하자는 안을 받아들여 일본과 한국이 노력을 하니 실제로 좋은 사례가 만들어졌다. 이런 예를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잠재적인 것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무리하게 뭔가를 만드는 것보다 얼마든지 있는 것을 하나씩 하나씩 살려나가면 좋겠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는 “일본과 한국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신뢰 부족이었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신뢰라는 말이 나온 김에 양국 지도자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두 지도자의 강한 개성이 한일 관계를 꼬이게 만드는 ‘캐릭터 리스크’로 작용했다고 평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하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거의 같은 시기에 새로운 정권을 만들었는데, 그 시점이 일한 관계가 상당히 나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대통령도 총리도 고생을 했다. 두 지도자는 의지가 강한 리더라고 생각한다. 그런 리더들이 2015년을 계기로 양국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결의를 굳혔다. 나는 지금부터, 적어도 정부끼리는 좋은 방향으로 갈 것으로 기대한다.”

이런 질문은 외교관에게는 곤혹스럽다. 외교관이 자국이나 주재국의 지도자를 비판할 수는 없다. 다만, 어떤 시각을 갖고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인데 그는 꽤 잘 빠져나갔다. 기자가 단점으로 생각한 두 지도자의 ‘성격’을 좋은 결과를 기대하게 만드는 긍정적 요소로 바꿔버렸으니 말이다.

―위안부 합의는 어떻게 평가하나.

“양쪽이 어떻게 하면 해결의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 최대한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쌍방이 확실하게 이행함으로써 이 문제를 수습해 나갔으면 좋겠다.”

―합의 이행과 소녀상 이전과의 관계에 대해서는(이 문제는 한일이 가장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현안이다).

“일본과 한국의 외교장관이 세계 앞에서, TV 카메라 앞에서 주고받은 게 있다. 지금 그 문구를 일일이 반복해 봤자 소용이 없겠지만 그걸 봤으면 좋겠다. 거기에 모든 것이 적혀 있다고 생각한다.”

벳쇼 대사는 ‘연계돼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듯했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해 달라.

“한국의 정부가 어떤 방향으로 노력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나는 기대한다.”

그 이상 답변을 강요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내기로 한 10억 엔을 주지 말자는 일본 국내의 분위기에 대해서도 “일본과 한국, 쌍방이 성실하게 합의를 이행하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양국이 합의를 했다’는 데에 무게를 두는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과거 경험을 들려줬다.

“1995년부터 2년 7개월간 외무성에서 한국을 담당했다. 그때 얻었던 긍정적 경험이 아까 얘기한 월드컵 공동 개최였고, 그 반대 경험이 위안부 문제다. ‘아시아여성기금’의 실패는 일본이 일방적으로 선의를 베푼다, 선의로 뭔가 행동을 한다는 것만으로는 잘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줬다. 양국의 정부가 합의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최근 수년간 위안부 문제를 논의할 때 일본과 한국 정부가 확실하게 합의를 해야 한다, 그것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해 왔다.”

중국에 대한 한일 간의 시각차가 매우 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물어봤다. 중국에 대해 일본이 갖고 있는 불신, 즉 군사력 팽창과 해양 지배 의도, 다른 정치 체제 등을 그도 언급을 했지만 생략하자. 그는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중국에 대한 일본과 한국의 시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일한 간 대립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한이 협력해서 중국이 지역의 대국으로서 책임 있는 정책을 추진하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하다.”

그가 종전에 한 인터뷰를 살펴보니 오래 근무한 것에 비해서는 그리 많지가 않았다. 주요 언론사와의 인터뷰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여기서도 한일 간의 신뢰 부족이 엿보였다. 2014년 2월 본보와의 인터뷰는 “(대사의 생일이었는데도) 대사관에서 만난 그의 얼굴에선 얕은 미소조차 찾기 어려웠다”는 말로 시작해 “그렇게 80분의 질의응답을 끝냈지만 답답함과 아쉬움은 해소되지 않았다”로 끝나 있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그가 100% 진솔한 대답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그는 확신을 갖고 성의껏 대답했다. 이런 변화는 어디서 왔을까. 벳쇼 대사는 가장 어려울 때 한국에 부임해서 그나마 ‘희망’을 갖고 떠나게 된 것에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그렇지만 아쉬움도 숨기지 않았다.

“역시 아쉬웠던 것은 특정한 일보다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더 잘됐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희망과 기대를 말하지만, 지금과 같은 어려운 상황에 있는 것 자체를 아쉽게 생각한다. 좀 더 개운한(はればれした) 기분으로 떠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인터뷰 말미에 “모처럼 한국에서 유엔대사가 가니까 (유엔에서) 한국과의 연계는 확실히 취하겠다”고 덕담을 했다. 그가 혼자서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한국과 일본이 유엔이라는 국제무대에서 미국이 서로 자기편이라고 끌어들이며 볼썽사납게 싸우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혹시 싸우게 되더라도 전 주한 일본대사, 벳쇼 고로가 지혜와 인내를 발휘해 주면 더 좋겠고.


▼주말마다 한글 서예 맹연습… 한일축제 땐 춤추기도▼
 
‘문화 대사’로 사랑 받은 벳쇼

 
벳쇼 대사가 16일 환송회에서 일본전통연극 ‘노’에 나오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벳쇼 대사가 16일 환송회에서 일본전통연극 ‘노’에 나오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
벳쇼 고로 대사는 한국에 있는 동안 ‘문화대사’를 자임했다. 도쿄대 법학부에 입학하면서 일본의 전통 연극인 ‘노(能)’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계기가 돼 임지를 옮길 때마다 그 나라의 문화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16일 저녁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S타워빌딩에서 열린 환송연에서 노에 나오는 노래를 직접 불러 박수를 받기도 했다.

그가 한국에서 열심히 배운 것은 한글 서예였다. 2012년 가을, 부임하자마자 한글 서예에 매력을 느끼고 선생님을 찾았다. 황진수(黃眞洙) 선생을 모시고 대사관저에서 매주 2차례 지도를 받았다. 바쁜 일정 때문에 수업을 거른 적도 있으나 주말만큼은 맹연습을 했다고. 3년 반가량 흘린 땀은 5개의 작품으로 남았다. 그는 이 작품들을 ‘자랑스럽게’ 대사관저 홀에 걸어놓았다. 한 작품은 부인 마리코 여사가 꽃으로 장식해 2014년 5월 각국 대사 부인들이 참가하는 꽃꽂이 전시회에 출품하기도 했다. 작품명은 ‘부부의 컬래버레이션’.

대학생일본어연극대회 시상식 후 학생들과의 기념사진. 주한일본대사관 제공
대학생일본어연극대회 시상식 후 학생들과의 기념사진. 주한일본대사관 제공
벳쇼 대사는 대학생 일본어연극대회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 대회는 주한 일본대사관 주최로 매년 열리고 있다. 그는 “한국의 젊은이들이 다른 나라의 문화라는 것을, 혹은 사회라는 것을 이해해서 연기를 하려는 모습을 보며 상당히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매년 본선에 올라오는 연극을 모두 보고, 시상을 한 뒤, 뒤풀이까지 꼭 참석했다.

매년 9, 10월에 열리는 한일축제한마당도 그가 기다리는 행사 중 하나였다. 그는 특히 피날레를 좋아했다.

“관중도, 연기자도 모두 하나가 되어 춤을 추는 피날레는 대단히 훌륭하다. 양국 국민이 한때를 공유한다는 것이 감동적이다. 그래서 나는 춤을 잘 추지 못하지만 피날레 때는 언제나 솔선해서 원 안으로 뛰어든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이나 국립민속박물관, 국립국악원도 방문했다. 그런데 대사로서 공식방문을 했다고 한다. 혼자 즐기는 것도 괜찮지만 대사로서 한국 문화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벳쇼 대사는 여기저기서 참석해 달라는 많은 요구에 대해 “가능하면 내가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도움을 주는 곳으로 가려고 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지방의 작은 마을을 방문하고, 작은 그룹과 만날 기회도 많았다. 전남 영암에서 열리는 왕인박사축제에 참가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심규선 대기자 ksshim@donga.com
#벳쇼 고로#주한 일본대사#문화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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