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장 ‘무늬만 공모’]<中>철새처럼 왔다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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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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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위 심사는 휴지조각… 윗선 입맛 맞게 평가방법도 바꿔



지난해 초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의 자(子)회사 기관장 선임을 위해 사외이사와 민간위원 등 총 8명으로 구성된 추천위원들이 서울시내 모처에 모였다.

처음 세 번의 모임에서 서류전형, 면접을 통해 전체 지원자 10명 중 4명의 추천후보를 골랐다. 문제는 4차 회의에서 터졌다. 이 기관의 대주주인 문화부 산하 공공기관 측이 “4명 가운데 적임자가 없으니 다시 공모를 하라”고 회신한 것. 많은 위원들이 “정권이 낙점한 인사(A 씨)가 탈락한 6명 중에 있으니 공모를 다시 진행해 후보에 포함시키라”는 요구로 받아들였다.

위원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추천위원장은 “말년이 다된 내가 원칙에 어긋나고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뭐하러 하겠느냐”고 항의하며 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다른 위원들의 항의도 줄을 이었다.

“결국 자기들이 선정하면서 ‘도덕적 정당성’만 채우겠다는 것이다.”

“(추천위원도) 모두 인격과 자존심이 있는데 이럴 바에는 대주주가 사장을 바로 선임하는 게 낫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입수한 공공기관장 추천위원회 회의록에 담긴 내용은 실제로 추진되는 공모제가 ‘능력 있는 인사를 폭넓게 골라낸다’는 원래 취지에서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 속속들이 확인시켜 준다.

이런 사태가 벌어진 뒤 교체된 위원장이 주도한 추천위는 평가방법까지 변경해 낙하산 논란을 빚은 A 씨를 사장으로 선임했다. A 씨는 민선 시장을 지냈고 현 정부 초기에 장관 후보로도 거론됐던 정치인 출신으로 전문성 면에서 다른 후보보다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가 조직 안팎에서 나왔다. A 씨는 이 공공기관 사장에 취임한 뒤 6개월 만에 여당에 총선 공천신청을 했지만 탈락해 또 한 번 논란을 빚었다.

이처럼 공모제는 껍데기만 남아있을 뿐 의미는 상실된 지 오래다. 또 파행적인 공모 과정을 거쳐 선발된 공공기관장들의 일부는 임기와 관계없이 기관장 자리를 헌신짝처럼 팽개치기도 한다. 윗선의 낙점(落點)을 받아 손쉽게 자리를 차지한 이들에게 기관장 직함은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다.

○ 절반 가까이는 임기도 못 채워

대한석탄공사는 현 정부 들어 4년 반 동안 4번이나 기관장을 공모했다. 사장들이 선거 출마를 이유로 임기 중간에 잇달아 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취임한 조관일 전 사장은 취임 후 1년 반도 채 지나지 않은 2009년 12월 사임했다.

이듬해 지방선거에서 강원도지사직에 출마하기 위해서였다. 강원도 정무부지사를 지낸 그는 2008년에도 총선에 출마하려다 공천을 받지 못했고, 이후 석탄공사 사장 공모에 지원해 선임됐다. 이 때문에 당초 총선 낙천에 대한 ‘보은 인사’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후임자도 다르지 않았다. 두 번의 공모 끝에 관료 출신인 이강후 전 사장이 2010년 4월 사장에 취임했지만 1년 9개월 만인 올 1월 사표를 쓰고 새누리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석탄공사는 최근 매년 수백억 원의 적자를 보고 있고, 부채가 1조5000억 원에 육박한다. 이런 와중에 기관장의 잇단 정치적 행보로 업무공백까지 생긴 셈이다.

취재팀이 2008년 6월 이후 공모제를 통해 기관장직에 올랐다 퇴임한 87명의 실제 재임기간을 분석한 결과 이 중 43.7%(38명)는 정해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물러났다. 또 27.6%(24명)는 통상 3년인 공식 임기의 절반(1년 반)이 채 지나기 전에 옷을 벗었다. 중도 퇴진의 유형은 총선이나 지방선거 출마 등 자진 사퇴가 가장 많았다.

한국철도공사 산하 코레일유통의 이학봉 전 사장은 2009년 2월 취임했지만 1년 2개월 만인 2010년 4월 서울 중구청장에 출마하겠다며 사표를 냈다. 그는 한나라당 공천을 받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 전 사장은 이명박 대통령후보 정책특보, 후원회 부회장 등을 지낸 인사다.

경남 남해군수 등을 지내고 2010년 11월 취임한 하영제 전 농수산식품유통공사 사장도 총선 출마를 선언하며 10개월 만에 사퇴했다. 하 전 사장은 올해 총선에서 새누리당 공천을 받지 못했고 지금은 김두관 민주통합당 경선후보의 대선 출마로 공석이 된 경남도지사 자리를 노리고 있다.

○ 정권 입맛 따라 인사 전횡 반복

기관장 재임 도중 정권의 필요에 따라 자리를 옮기느라 임기를 채우지 못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또 비리나 자격 논란에 휘말린 기관장도 있다.

어청수 전 경찰청장은 ‘쇠고기 시위’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가 2011년 8월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16명이나 지원했지만 어 청장이 이사장에 선정됐다. 정부로서는 “정권의 최측근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었지만 정작 그의 임기는 두 달이었다. 그해 10월 경호처장으로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두 달 만에 이사장 자리가 빈 국립공원관리공단은 기관장 공모를 다시 진행해야 했다. 정연태 전 코스콤 사장은 2008년 6월 공모를 거쳐 취임했지만 10일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법원에 개인파산을 신청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자격논란에 휘말린 것. 이를 두고 “기관장 후보의 도덕성과 전문성을 철저히 검증하라는 취지로 도입한 공모제가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이유종 기자 pen@donga.com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공공기관장#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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