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50년]<中>전직 국정원 요원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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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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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위해 일했는데 고문만 떠올려… 죽어서도 음지 못벗어나”

국정원 보국탑 참배 국가정보원 청사 앞의 보국탑. 안보전선에서 일하다 숨진 요원 48명을 기리는 곳이다. 평생 대공수사를 담당하다 퇴직한 6명이 지난달 26일 본보 취재진을 만나기 전에 참배하는 모습.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국정원 보국탑 참배 국가정보원 청사 앞의 보국탑. 안보전선에서 일하다 숨진 요원 48명을 기리는 곳이다. 평생 대공수사를 담당하다 퇴직한 6명이 지난달 26일 본보 취재진을 만나기 전에 참배하는 모습.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인릉 주차장을 지나 국가정보원 청사를 오른쪽으로 하고 200m가량 올라가면 보국탑(保國塔)이 보인다. 순직한 국정원 요원들의 위패가 있는 곳. 정남향 건물인 국정원 청사를 정면으로 향하는 지점이라 늘 그늘이 진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는 국정원 모토대로, 이들은 죽어서도 음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다. 지난달 26일 오전 10시 10분경. 승용차 3대에 나눠 탄 노신사 6명이 이곳을 찾았다. 헌화 분향 묵념이 이어졌다. 대형 화환에는 ‘전직 대공수사요원 일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행은 탑 뒤의 위패봉안실에 들렀다. 북한공작원의 독침에 피살된 해외 지부장, 아프리카에서 풍토병에 걸려 쓰러진 서기관…. 명단의 마지막인 48번째 이름(정○○)을 보고 누군가 입을 열었다.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떴지. 서른두 살. 우리 사무실 직원이었는데….” 》
전직 대공수사요원 6명이 국정원 창설 50주년(10일)을 앞두고 한자리에 모였다. 4명은 대공수사국장, 2명은 대공수사단장을 지냈다. 면회실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나눌 때 이들은 서로를 ‘고문’ ‘회장’ ‘부회장’으로 불렀다. 물론 가명이다. 이들은 어떻게 대공수사의 길을 걷게 됐을까.

“국가재건최고회의 간부요원 선발 공고를 봤다. 1961년 8월 5일인가. 국회사무처 직원인 줄 알았지. 와보니까 중앙정보부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공채 1기로 지원한 거지.”(김영훈 고문)

“대학생 시절, 중정을 해체하라는 시위에 참여했다. 1969년 특별직 공고가 났는데 우리가 알던 정보부와 실제는 다르다며 선배가 권유했다. 은행에도 동시에 합격했지만 중정 인사계장이 못 가게 했다.”(박인호 회장)

“당시 유행하던 007영화처럼 가방을 들어보고 총도 쏴보자는 생각에 들어왔다. 1974년이다. 장가갈 때 외무부 다닌다고 거짓말했다. 신혼여행 뒤 20일간 집에 못 들어가니까, 처가에서 나를 내사했다.”(장유진 부회장)

김 고문은 대공수사가 예나 지금이나 3D업무라고 표현했다. 중정 창설 직후에는 남파간첩을 가둘 시설이 없어 수사관이 함께 먹고 자야 했다. ‘정보 파트는 양반, 수사 파트는 노가다’라는 말이 나왔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대공수사국에는 고사를 지내는 전통이 내려왔다. 1년에 한 번, 모든 요원이 연병장에 모여 잘 익은 수박과 돼지 머리 앞에서 외쳤다. 김일성 타도! 간첩 필포(必捕)!

심일청 고문은 “국장 시절, 고사를 지낸 지 20일 만에 김일성이 죽었다. 만세를 불렀지만 한 달 뒤에 직위해제됐다”고 밝혔다. 무슨 사연이었을까.

강성산 북한 총리의 사위인 강명도 씨가 귀순한 뒤 기자회견을 했다. 1994년 7월 27일이었다. 북한이 핵탄두 5개를 갖고 있다는 내용이 문제였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지 않던 미국이 불만을 나타냈다.

“기자회견의 모든 내용은 내부조율과 보고를 거쳤다. 처음에는 청와대도 잘했다고 격려금을 줬다. 그런데 다음 날인가, 누가 지시했냐고 감찰실이 조사에 들어갔다. 미국을 달래기 위해 내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정리됐다. 죽은 김일성이 핵으로 나를 죽인 셈이지.”

대공수사는 장기전이다. 첩보를 입수하면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1년이 2년이 된다. ‘(대공수사의) 사전’이라는 별명을 가진 한용무 고문은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을 예로 들었다.

“14대 총선(1992년)에서 민중당이 1석도 못 건졌다. 나는 창당 자금에 의문을 가졌다. 민중당 간부 한명 한명과 인간적으로 친해지며 첩보를 모았다. 황인오라는 인물이 500만 원을 지원했다는 말을 어느 출마자에게서 들었다. 황의 집에 북한 원전(原典)과 컴퓨터가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6개월을 추적해서 잡았다.”

안기부는 1992년 10월 민중당 공동대표인 김낙중 씨, 중부지역당 총책인 황인오 씨 등 62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했다. 북한에서 밀파된 거물간첩 이선실의 지휘를 받아 남한에 노동당지부를 결성하고 지하활동을 벌인 혐의였다.

이영민 부회장은 일심회 수사에 대해 언급했다. 재미교포인 장 마이클이 중국에서 북한공작원과 접선한 사실을 국정원이 확인한 뒤 2006년 10월∼2007년 2월 관련자 6명을 잇따라 구속했다.

장 마이클은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일심회를 결성했는데 386운동권 출신이 대거 연루됐다는 의혹이 나왔다. 수사를 확대하려 하자 여권에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격려와 칭찬은커녕 외부개입이 많았다. 당시 일을 다 얘기하기 어렵다. 업무상 지득한 일은 무덤까지 갖고 가겠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직파간첩인 정경학의 체포 사실도 발표하지 못하게 했다.”

일심회 얘기가 나오자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 10년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고 입을 모았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를 받을 때 참담함을 느꼈다. 멸사봉공했는데 과거 상황은 생각 않고 지금 잣대로 독재정권에 일조했다니….”(이 부회장)

“요원 중에 잘사는 사람이 없다. 옛날 일을 갖고 구상권을 행사한다고? 이건 나라가 우리를 버리는 거야.”(심 고문)

“가슴에 응어리가 진다. 아버지가 고문이나 하는 사람으로 애들에게 비치지 않겠나. DJ 이후 공안부서는 좌천 또는 기피부서가 됐다.”(박 회장)

박 회장의 말처럼 정보기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고문이나 납치 같은 가혹행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대공수사요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간첩은 잡히면 입을 열지 않으려 한다. 결국 ‘쫄’ 수밖에 없다. 한참 조사하다가 내일 오전 8시에 다시 보자? 이런 식으로 수사가 되겠나. 우리를 죽이러 온 놈들을 상대하면서 48시간 내에 영장을 받는 게 가능한가.”(김 고문)

“유능한 수사관은 체벌하지 않는다. 주먹이 올라가는 일은 가끔 있었다.”(심 고문)

절차 위반과 가혹행위가 불가피했다는 식의 설명에 박 회장은 조금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후배들은 선배들 때문에 도매금으로 넘어간다. 이제는 규정을 지켜야 한다. 요즘은 중요한 용의자를 잡으면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고 이런 과정을 비디오 촬영팀이 기록한다.”

한 고문은 인권의식이 강화되고 대북 경계심이 약해지는 상황에서 후배 요원들이 어렵게 일한다며 세 가지를 주문했다.

“첫째, 애국심이다. 조국과 민족과 역사를 생각해야 한다.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둘째, 인내와 지구력이다. 대공사건은 집요함과 집념이 요구된다. 셋째, 직무지식 함양이다. 출근하면서 버스 안에서 북한 서열을 외우고 다니는 열정이 필요하다.”

장 부회장은 북한의 대남 공작이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상황에서 대공수사요원이 국가의 보루라고 강조했다.

“언제나 자긍심을 갖고,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고독한 업무를 해야 한다. 언젠가는 우리를 인정해줄 것이다. 공과를 인정할 것이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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