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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저 푸른 바다처럼 오늘도 내일도 나는 ‘청춘 박상원’

입력 2015-06-25 03:00업데이트 2019-11-29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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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와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숲 길’]
배우 박상원, 강원도 강릉 바우길 5구간 트레킹
배우 박상원 씨(오른쪽)가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19일 강원 강릉시 경포해안을 걷고 있다. 두 사람은 트레킹 코스 바우길의 솔밭 길을 걷다가 초여름 바닷바람을 맞기 위해 해변으로 나왔다. 엄 대장과 함께 히말라야에도 갔었던 박 씨는 “산악인인 엄 대장이 이렇게 바닷가 길에서 트레킹을 할 수도 있다”며 크게 웃었다. 강릉=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일상적인 삶을 가장 편하게, 잘 연기하는 배우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 히트작을 연출했던 고 김종학 프로듀서가 탤런트 박상원 씨(56·서울예술대 교수)에 대해 생전에 남긴 평이다. 보통 배우들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천차만별로 엇갈린다. 배역에 따라 또는 배우 고유의 개성이나 이미지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박 씨에 대해서는 다르다. 김 프로듀서의 평이 곧 ‘박상원’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 표현으로 굳어졌다. 혹자는 그를 연기할 때 속임수를 쓰지 않는 배우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의 연기를 평가하는 데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동원하는 것은 어쩌면 그를 깎아내리는 것일 수도 있다.

강원 강릉의 바다를 따라 펼쳐진 ‘바우길’ 역시 눈속임이란 없다. 사방으로 펼쳐진 장관 속에 인공적으로 보태고 뺀 것이 없다. 자연 그대로 다가오는 다채로운 풍경이 그저 감동적이다. 역시 수식어가 필요 없다.

강릉 바우길은 강릉지역을 중심으로 경포(鏡浦)와 정동진(正東津) 등 동해안을 잇는 총 350km가량의 트레킹 코스다. 바우길은 16개 구간으로 이뤄져 있다. 19일 박 씨는 바우길 중에서도 경관이 가장 뛰어나다는 5구간 10km를 미소를 지으며 걸었다. 바우길 5구간은 바다와 숲길, 바다에서 바다를 따라 걷는 코스가 섞여 있어 지루하지 않다.

출발지인 사천해변공원에서부터 박 씨는 쪼그려 앉아 바다의 냄새를 맡았다. 공원에서 바다를 끼고 소나무들이 길게 펼쳐진 해송숲길로 연결된 구름다리 밑에서 갈매기들이 손님을 맞이했다.

“기가 막힙니다.”

감탄사를 연발하는 박 씨의 첫 카메라 셔터 소리에 새들은 아껴둔 날갯짓을 자랑하며 트레킹의 시작을 알렸다.

○ 뮤지컬 1세대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

배우 박상원 씨가 바우길의 솔밭 길을 걷고 있다. 사진집을 펴내기도 했던 박 씨는 이날 트레킹 코스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했다. 강릉=이훈구 기자 ufo@donga.com
해풍을 머금고 세월을 보낸 솔밭 길 너머로 물결이 넘실댔다.

“파도 소리 들려요? 나만 들리나? 배우는 외로운 직업 같아요. 나만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연기로 고집할 수는 없다는 거죠.”

그가 연기한 ‘인간시장’의 장총찬이나 ‘여명의 눈동자’의 장하림, ‘모래시계’의 강우석 검사는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꽤나 현실적인 인물로 표현됐다. 그는 적절한 감정 표현과 과하지 않은 분노 표출만으로도 큰 공감을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드라마 ‘첫사랑’ 속의 강석진은 사랑하는 여자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 감정을 절제하면서 결국 여자가 진정 바라는 사랑을 찾을 수 있도록 부단히 애를 쓰는 인물로 묘사됐다. 사랑을 얻지 못한 아픔을 격렬하게 부각시키는 대신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현실적인 한계를 받아들인다. 잔잔한 미소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묵묵히 여자가 원하는 길을 가도록 돕는다. 쟁취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사랑법을 표현한 ‘박상원식 연기’는 일상 속의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연기는 바쁘게 몸을 움직이면서 얻은 발품과 경험의 소산이다.

“의도적으로 말투를 바꾸고 전형적인 이미지를 벗어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배역에 맞는 연기가 나오는 건 아니죠. 정치, 사회에 관심도 가져보고 젊은 사람들과 사랑이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즐깁니다. 내가 연기 방법을 바꾸지 않아도 그런 경험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현실을 잘 반영한 연기가 나올 수 있다고 봐요.”

숲길을 빠져나와 순포해변과 사근진해변 길에 이르자 박 씨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모래사장과 하늘, 바다가 맞닿은 경관에 맞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박 씨는 두 번이나 사진전을 개최했을 정도로 사진 촬영에 열성적이다. 구석구석 바우길의 절경을 사진에 담았다. 이러한 경험도 그가 또 다른 연기를 펼칠 때 밑바탕이 될 자산이 될 것이다.

사근진해변 인근에는 여름철 휴양객들을 기다리는 펜션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를 보고 그가 말했다. “얼마 전 아들과 바다가 보이는 펜션에 묵은 적이 있어요. 아침에 일어나 함께 눈곱을 떼고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나중에 이 모습을 연기할 기회가 오겠죠? 하하.”

추억을 더 뒤로 되짚어 보자. 그는 뮤지컬을 통해 데뷔했다. 1979년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초연 작품이다. 박 씨는 “사실 탤런트보다 뮤지컬 1세대 배우라고 불러주는 게 좋다. 그때 6개월 동안 준비를 해서 무대에 섰는데 그때의 설렘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며 먼 바다를 지긋이 바라봤다.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는 뮤지컬에 신경을 쓰느라 시나리오를 한동안 방구석으로 치워버렸던 작품들이에요. 정작 그 작품들로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됐으니 참 아이러니하죠.”

○ 첫 무대 데뷔시킨 동아일보는 연기 인생의 은인

사근진해변의 명물은 단연 멍게바위다. 말 그대로 멍게처럼 생겼는데 돌 바위 윗부분이 넓고 평탄해 마치 바다를 관객 삼아 공연을 펼쳐도 될 무대 같다. 실제 무속인들이 멍게바위에서 자주 기도를 한다고 한다.

박 씨에게도 첫 무대가 생각나게 하는 멍게바위다. 공식 데뷔는 1979년에 했지만 그전에 엑스트라로 무대에 올랐던 적이 있다며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아련한 추억을 밝혔다.

“1978년 4월인가로 기억하는데 동아일보가 로열발레단 ‘마농’ 내한공연을 주최했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는데 제가 대학 1학년 때 오디션을 보고 엑스트라로 뽑혔어요. 그때 열흘 정도 공연을 했죠. 하루 7000원 정도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 무대에 서 처음 돈을 번 작품이었어요. 동아일보가 ‘박상원’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하.”

○ 느린 보폭으로 자연처럼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배우로 남고파

멍게바위를 지나 경포 해변에 이르러 트레킹 행렬은 경포호수 방향으로 향했다. 검은 소나무라 해서 이름이 붙여진 ‘검솔’이 일렬로 늘어서 지나는 이들을 배웅한다. 파도를 따라 재촉한 걸음은 잔잔한 호숫가 산책로에서 속도가 줄었다.

박 씨의 바지 주머니에서 낯선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최신 스마트폰이 아니다. 박 씨는 요즘 보기 드문 2세대(2G) 휴대전화를 아직도 사용한다. 휴대전화 번호는 여전히 017로 시작한다.

게다가 박 씨의 지갑은 가죽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하얀 종이로 만든 지갑을 꽤 오랫동안 쓰고 있다. 박 씨는 지갑 안에 ‘돈을 빨리 꺼내 쓰지 말고 아껴 쓰자’ 등의 글을 직접 써 넣었다.

“세상이 빠르게 바뀌면서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데 나라도 느려야 하지 않겠어요?”

때마침 호수 진입로에 서 있는 우체통이 박 씨를 반겼다. 박 씨는 “휴대전화 문자보다는 편지를 잘 쓰는데…”라며 걸음 속도를 더 줄였다. 시간이 지나도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도록 ‘느림의 미학’을 실천하는 배우로 남고 싶다는 그다.

“사실 요즘 나이를 먹는 게 마음에는 안 들어요.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어린 ‘박상원’이고 젊은 ‘박상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1994년 35세 때 찍은 ‘모래시계’의 강우석 검사 역할이 지금 주어지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도 “같은 연기를 하겠지”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경포호 경관에 취해 경포대 방향으로 걷다 보면 자칫 5구간의 마지막 볼거리인 가시연 습지를 보지 못하고 옆길로 빠질 수 있다. 다시 도로를 건너는 수고를 겪고 나서야 가시연 습지가 눈에 들어왔다.

박 씨는 개의치 않았다. 천천히 많은 세상 경험을 할 수만 있다면 험한 길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박 씨다.

“인생의 길을 걷다 보면 쉬운 길이 아닌 힘든 길로 빠질 때도 있잖아요. 빨리 가려는 욕심만 갖지 않고 그저 쉬운 길이다, 험한 길이다 정도 구분해줄 수 있는 보배 같은 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트레킹을 마친 후 박 씨는 식당에서 바우길의 경관을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담아 목으로 넘겼다. 소주는 마시지 않았다. “소주는 빨리 취해서 평소 마시지 않습니다. 천천히 오래 제 몸에 오늘을 담아두고 싶네요.”

東亞日報와 밀레가 함께하는 열두 길 트레킹

강릉=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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