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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사회

[Narrative Report]3대 모녀, 절망서 길어올린 ‘맛있는 희망’

입력 2014-05-22 03:00업데이트 2019-04-1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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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서귀포시에서 메로 요리 식당을 운영하는 남신자 씨(왼쪽)와 제주신라호텔의 박영준 셰프가 주방 앞에서 “우리 식당 최고”를 외쳤다. 남 씨는 “식당의 새로운 탄생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박 셰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호텔신라 제공
“TV 보고 전화 드려요. 보니까 어려운 식당들 도와주시는 거 같아서요. 시설도 고쳐주시고 메뉴도 바꿔주시고…. 저희 어머니 식당을 신청할 수 있을까요? 5년째 장사하시는데 너무 장사가 안 돼서….”

“네, 식당 크기가 어느 정도 되죠? 테이블은 몇 개나 있어요?”

“한 번도 안 가봐서 잘 모르겠어요.”

“네? 어머니 식당이라면서요?”

“아…. 제가 전신마비라 나가지를 못해요.”

○ 추락 그리고 버림받음

바다 내음과 꽃향기가 섞인 제주도의 5월. 정확히는 2005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두 살배기 딸의 재롱에 미소가 넘쳤던 그날, 당시 28세였던 그녀는 남편과 함께 친구 집을 찾았다. 모임은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던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발을 헛디딘 걸까. 그녀는 갑자기 베란다에서 마당으로 추락했다.

친구들은 그녀를 가까운 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다. 2시간을 기다렸을 때 의사는 “여기서는 치료가 불가능하니 다른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더 큰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시 1시간을 넘게 기다렸다. 오랜 기다림 동안, 그녀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에 몸속 작은 세포들은 힘을 잃어갔다. 두 번째 병원 의사는 “제주도 말고 다른 데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녀가 눈을 뜬 건 3일 만이었다. 눈을 뜬 게 전부였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 많이 아파?”라고 묻는 딸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섯 달이 지나자 겨우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그녀가 다시 딸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기 전에 사라졌다. 어떤 말도 없었다. 그녀에게도, 어린 딸에게도, 그녀 옆을 지키는 장모에게도. 남자는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

그녀는 누운 채로 수원에서 제주로 돌아왔다. 이후 낮이고 밤이고 병실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다섯 달이 흘렀다.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은 점점 멀어졌다. 그때 남편이 보낸 편지가 도착했다. 뜯어 보니 이혼소장이었다. 법원은 이혼을 판결했다.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 남편이 양육비를 지급하는 조건이었다. 잠시 나타났던 남편은 그날로 다시 사라졌다. 9년이 흐른 지금까지 깜깜무소식이다. 양육비는 한 푼도 보내지 않았다.

○ 죽고 싶다는 딸… 놓지 않는 엄마

사고 이후 그녀의 삶이 달라진 것만큼 어머니 남신자 씨(62·당시 53세)의 삶도 변했다. 남 씨는 운영하던 횟집을 접었다. 딸과 함께 지내기 위해 문을 닫은 횟집을 살림집으로 개조했다.

딸은 희망을 잃어도 엄마는 아니었다. 엄마에게 유독 살가웠던 큰딸이었다. 남 씨는 딸의 치료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당장 일어날 수 있을 거란 기대는 안 했다. “혼자서 밥이라도 먹을 수 있게 하려고 정말 온갖 데를 다 찾아갔어요.”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전전했지만 그때마다 허탕이었다.

딸은 점점 말을 잃어갔다. 가끔 하는 말은 “엄마, 나 좀 죽여줘”였다. 남 씨도 어려움에 빠졌다. 일을 그만두고 딸의 치료와 간호에 매달리다 보니 빚이 수억 원으로 늘어났다. 그는 횟집을 운영하기 전 한복가게를 했었다. 제주도에서는 꽤 유명했다. 사정이 어렵게 되니 주변에서 “남부럽지 않게 곱게 살던 사람이 저렇게까지 될 줄 몰랐다”며 불쌍해했다. 남 씨는 개의치 않았다. 딸을 요양시설에 보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주변의 권유도 듣지 않았다.

“내 몸이 멀쩡한데 아픈 딸을 어떻게 다른 곳에 보내요? 내 딸은 내가 데리고 있겠다는 마음뿐이었죠.”

사고 후 남 씨의 딸은 한 번도 일어나지 못했다. 고민 끝에 남 씨는 생계를 위해 2009년 식당을 열었다. 다시 횟집을 열 만한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메로(심해에 사는 흰 살 생선) 식당’이었다. 횟집을 운영할 당시 거래상들은 메로 머리를 덤으로 주곤 했었다. 그걸 가지고 탕으로 끓이거나 구워서 손님상에 올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중간은 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는 헛된 것일 뿐이었다. 하루에 손님을 3, 4팀 받는 게 고작이었다. 남 씨는 메로 요리에 대해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 눈대중 손대중으로 음식을 만들었다. 게다가 딸이 병원을 가야 하는 날이면 가게 문을 닫아야 했다. 단골이 생길 리 없었다. 한 그릇이라도 더 팔려는 마음에 메뉴를 늘려 보기도 했다. 동태탕, 대구탕, 내장탕 심지어 김치찌개까지 메뉴판에 올렸다. 결국 하루에 한 그릇도 안 팔리는 메뉴만 늘었을 뿐이었다. 빚은 더 늘었다. 하소연할 곳은 없었다.

○ 천사처럼 나타난 호텔 주방장

제주신라호텔의 박영준 셰프(34)가 제주 서귀포시 중정로에 있는 남 씨의 식당을 찾은 건 올해 3월 중순이었다. 먼저 손님인 척하고 앉아 테이블과 부엌 등 구석구석을 살폈다. 음식도 이것저것 시켰다.

“정말 영세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파리도 많고 테이블에는 선풍기가 올려져 있었죠. 음식은 조미료 맛이 너무 강했어요. 메뉴도 지나치게 많았고요.”

박 셰프는 민망한 웃음을 연신 지어야 했다. 사실 그는 호텔신라의 ‘맛있는 제주 만들기’ 프로젝트 때문에 식당을 찾은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호텔신라가 제주도청, 지역 방송사와 함께 벌이고 있는 사회공헌활동. 어려움에 처한 가게를 종합 컨설팅해 새롭게 바꿔준다. TV를 통해 이런 프로젝트를 알게 된 남 씨의 딸이 참여 신청을 했다. 늘 엄마에게 미안한 딸의 절실함은 통했다. 남 씨의 메로 식당은 맛있는 제주만들기 3호점으로 선정됐다.

한 달간의 신장 개업 프로젝트는 혹독했다. 박 셰프를 비롯한 자문단은 우선 좌식 테이블을 치우고 의자에 앉는 테이블로 바꾸게 했다. 혼자서 요리하고 서빙도 하는 남 씨에게 좌식 테이블은 불편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주방 설비와 요리 도구, 식기도 모조리 바꿨다.

그 다음 단계는 음식의 맛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메뉴는 없애고 메로만 다루기로 했다. 박 셰프는 비행기로 제주도와 수도권을 오가며 메로 전문점을 찾아다녔다. 호텔의 다른 셰프들과도 수차례 논의를 했다. 남 씨의 사연에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였기에 힘든 줄도 몰랐다.

이전까지 남 씨는 탕이든 구이든 메로의 머리 부위만 썼다. 그런데 사실 기름이 많은 머리는 탕 재료로 적합하지 않다. 박 셰프와 남 씨는 재료값이 더 들더라도 각각의 메뉴에 맞는 부위를 쓰기로 했다. 머리 고기, 목살, 가맛살은 구이에, 뽈살은 탕에 사용하기로 했다. 물만 넣고 끓여내던 매운탕과 맑은탕 국물은 멸치, 다시마와 메로 머리로 미리 우려낸 육수로 바뀌었다. 구이를 찍어 먹는 양파 소스도 개발했다. 새롭게 선보인 ‘메로 탕면’은 박 셰프의 작품이다. 그는 기본 육수에 새우와 된장 등을 가미해 홍콩식 탕면을 만들어냈다. 요리 후 남은 부위로 만든 메로 과자와 주먹밥도 요리를 더 풍성하게 했다.

○ 엄마는 딸을, 딸은 다시 엄마를


남 씨는 억척스럽게 호텔을 오가며 요리법은 물론이고 인사하는 법까지 새로 배웠다.

“박 셰프는 진짜 아들도 이 정도는 못하겠다 싶을 정도로 열심이었어요. 저도 모르게 오랜만에 미소가 지어지더라고요. 나 때문에 고생한 사람들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죠.”

메로 식당은 지난달 16일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확 바뀐 외관은 물론이고 확 달라진 맛에 대한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몰리고 있다. 이 식당은 서귀포의 관광명소 중 한 곳인 서귀포매일올레시장의 동문과 맞닿아 있다. 올레시장은 올레6코스를 가는 관광객들이 많이 들르는 곳이다. 식당을 찾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관광지의 다른 식당과는 다르게 정말 진국”이라며 즐거워한다. 물론 매출도 올랐다. 메로 요리는 이전보다 5배 이상 많이 팔린다.

늘어난 건 매출만이 아니다. 남 씨와 딸의 대화가 늘었다. 모녀는 예전에는 같이 울며 서로 “미안하다”라는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오늘은 얼마나 팔았는지부터, 오늘 낮에 들른 남녀는 아무래도 관계가 수상하다는 얘기까지 나눈다. 그럴 때면 눈물이 아닌 미소가 흐른다.

남 씨의 소망은 현재 초등학교 5학년인 손녀가 대학에 갈 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다. 그의 딸은, 움직이지 못하는 자기를 업느라 몸이 망가진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것이 꿈이다. 열한 살이 된 손녀의 장래 희망은 의사다. 아이의 기억 속 엄마는 언제나 누워 있었다. 그 때문에 자기가 의사가 돼도 엄마를 바로 낫게 하지는 못한다는 걸 안다. 그래서 ‘힘들어도, 고치는 데까지 엄마를 고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누워만 있는 엄마는 소녀에게 슬픔이었지만 지금은 희망이다. 서로에게 큰 슬픔이었던 엄마와 할머니가 지금은 서로에게 희망인 것처럼.

서귀포=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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