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수사 진화… “범인이 외계인 아니면 틀릴 수 없다”

수원=권기범 기자 입력 2021-04-17 03:00수정 2021-04-17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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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미제 해결사’ 유전자 분석수사 30년]
1991년 첫 도입… 年20만건 분석
이춘재 연쇄살인 등 밝혀내… 유전자 DB에 24만명 정보 담겨
범인 추가 범행 때 단서 활용
유전자 분석은 크게 예비검사와 채취(위쪽), 분리 등 전처리, 증폭(아래쪽 오른쪽), 분석으로 나뉜다. 15일 찾은 경기남부경찰청 합동법과학감정실 법유전자실험실은 분석 단계별로 유리벽을 이용해 공간을 모두 분리해둬 동선이 복잡했다. 분석 과정에서 유전자가 섞이면 안 되기 때문에 불가피한 과정이다. 수원=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15일 오후 경기 수원에 있는 경기남부경찰청 합동법과학감정실.

DNA채취실에 들어선 박민선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보건연구사는 파란색 의료용 장갑을 끼고 의료용 가위를 들었다. 흰 종이 위 핏방울로 보이는 빨간 자국 중 일부를 손톱 끝 정도의 크기로 잘라냈다.

삼발이에 놓인 흰 종이 위에 빨간색 조각이 올려졌다. 스포이트로 시약과 과산화수소를 차례로 한 방울씩 떨어뜨렸다. 빨간색이 사라지나 싶더니 청록색으로 변해 퍼져 나갔다. 박 연구사는 “혈흔이 맞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경찰들이 사건 현장에서 찾은 증거물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의뢰하면 가장 먼저 이뤄지는 ‘예비 검사’ 작업 가운데 하나다.

박 연구사는 경찰청과 국과수가 합동 감식 및 감정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2019년 말 설치한 합동법과학감정실 소속이다. 9명 규모로 크지 않지만, 지문 영상 혈흔 화재 등 웬만한 분석을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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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매일 신발과 바지, 체모, 현장 감식 때 쓴 면봉까지 다양한 증거물에 대한 유전자 분석을 의뢰받는다. 그때마다 옷을 뒤집고, 솔기를 뜯어내고, 신발 깔창을 뒤집는다. 어딘가에 남았을지 모를 범인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다.

“저는 증거물로 바지가 오면 꼭 주머니를 살펴보게 돼요. 범행 뒤에 주머니에 손을 꽂는 사람이 많은 건지, 거기서 유전자가 많이 나온다는 걸 경험으로 터득했어요.”(합동법과학감정실 박문희 보건연구관)

한국의 과학수사에 유전자(DNA) 분석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건 1991년. 그해 7월 국과수(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유전자분석실이 신설되면서부터다. 30년이 지난 지금, 유전자 분석 없는 범죄 수사는 상상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최근 사회적 공분을 샀던 경북 구미 3세 여아 사망 사건이나 2019년 이춘재의 연쇄 살인 행각을 밝혀낸 것도 유전자 분석 덕이었다. 현재 1년 동안 수사 목적으로 이뤄지는 유전자 분석은 약 20만 건에 이른다.

○ 콜드 케이스(장기 미제 사건)를 풀 열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소속 박문희 보건연구관(왼쪽)과 박민선 보건연구사는 2019년 말부터 경기남부경찰청에서 파견 근무하며 일선 경찰과 함께 호흡을 맞추고 있다. 수원=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유전자 분석은 크게 ‘예비 검사’와 ‘채취’, 유전자를 다른 물질과 분리하는 ‘전처리’, 아주 적은 유전자의 수를 크게 늘리는 ‘증폭’, 최종적으로 유전자 프로파일을 확보하는 ‘분석’ 작업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다수 선진국은 ‘짧은 연쇄 반복(STR) 검사’ 방식으로 유전자를 분석한다. 인간의 유전자는 ‘좌위’라 부르는 특정 위치에 염기서열 중 일부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때의 반복 횟수가 사람마다 다르다. 인간 유전자는 2개(상동염색체)로 구성돼 있으니, 이를테면 ‘15-16’ ‘28-31’ 같은 식이 된다. 이런 좌위를 여러 개 찾아 비교해 동일인인지 확인한다. 최소 9개 정도 일치하면 동일인으로 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엔 분석할 수 있는 좌위의 수가 4, 5개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이론적으로 23∼26개나 분석이 가능하다. 경찰과 국과수는 글로벌 표준인 20개 좌위를 활용해 일치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수가 적다고 확률이 떨어질 것이란 우려는 할 필요가 없다. 20개 좌위를 분석하면 ‘두 개의 유전자가 동일인의 것이란 분석이 우연일 확률’, 즉 분석이 틀렸을 확률은 0.0000000001%보다 작다. 과학수사 담당자들은 “범인이 외계인이면 틀릴 수도 있다”는 농담을 하곤 한다.

유전자 분석은 장기 미제 사건의 용의자를 찾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2017∼2019년 유전자 분석 결과를 토대로 수사가 재개된 건수는 991건에 이른다.

경기 안산단원경찰서는 20년 전 발생했던 강도 살인 사건의 범인을 최근 검거했다. 2001년 9월 8일 오전 3시경 안산시 단원구의 한 연립주택에 괴한 2명이 침입해 남편을 흉기로 살해하고, 현금을 훔쳐 달아났다. 당시 경찰은 범행 도구를 여럿 확보해 국과수에 유전자 분석을 의뢰했지만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아 사건이 미궁에 빠졌다.

지난해 6월 경찰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보관하던 증거물을 다시 국과수에 보냈다. 두 달 뒤 회신이 왔는데, 피해자를 묶었던 테이프에서 유전자가 검출됐다는 내용이었다. 수형자 데이터베이스(DB)에서 같은 유전자를 가진 범인도 찾아냈다. 한 교도소에 수감 중인 40대 남성이었다. 경찰은 최근 이 남성을 해당 사건의 강도 살인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이달 초 경기 일산서부경찰서도 미제 성폭행 사건의 범인을 13년 만에 검거했다. 실마리는 3개월 전인 1월 고양시 일산서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절도 사건 현장에서 나왔다. 경찰이 현장에서 채취한 증거물들을 국과수로 보냈는데, 미확인 유전자 정보를 모아 놓은 ‘범죄 현장 등 DB’에서 동일한 유전자가 발견됐다.

해당 유전자는 바로 2008년 7월 강간치상 사건 현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범인은 한 상가 1층 화장실에서 여성을 성폭행한 뒤 달아났는데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었다. 분석 결과를 받아든 경찰은 70일 가까이 추적해 이달 5일 30대 남성을 붙잡았다. 해당 피의자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 혐의로 구속 송치됐다.

○ “세포 1ng만으로도 충분하다”

장기 미제 사건을 하나둘씩 해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11년 전 시행된 ‘DNA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DNA법)에 따라 만든 ‘유전자 DB’ 덕이 크다. 이 DB에는 살인과 성폭행, 마약, 방화 등 11가지 범죄를 저지른 구속 피의자와 수형자 23만9377명(2019년 기준)의 유전자 정보가 담겨 있다. ‘범죄 현장 등 DB’에는 2010년 이전 보유하던 정보까지 포함해 모두 12만8075건(2019년 기준)의 정보가 저장돼 있다.

유전자 증폭 기술의 발전도 한몫했다.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익숙해진 PCR 증폭 방식을 쓰면 1ng(나노그램·1ng은 10억분의 1g)의 유전자만 있어도 양을 늘려 분석이 가능하다. 경찰청 과학수사담당관실 관계자는 “손가락을 잠깐 터치한 정도로도 유전자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미제 사건 현장에서 유전자를 찾았다고 사건이 단박에 해결되는 건 아니다. 분석 결과는 ‘그 사람이 거기 있었다’는 증거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추가 증거를 수집하고, 혐의를 밝혀내는 것은 경찰의 몫이다. 안산단원경찰서도 분석 결과를 받은 뒤 재소자였던 범인을 수차례 접견하고, 결정적 순간에 유전자 분석 결과를 제시해 자백을 받아냈다.

경찰청에 따르면 2009년 8만8083건이었던 유전자 감정 건수는 지난해 19만8698건으로 크게 늘었다. 국과수의 전체 감정 처리에서도 유전자 분석이 차지하는 비율은 31∼34%에 이른다.

경찰은 이르면 10월 프린터 크기의 휴대용 DNA 분석기를 도입해 시범 운영할 계획이다. 약 7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 ‘래피드(rapid) DNA’로 불리는 장비 2대의 구매를 진행하고 있다. 이 장비가 도입되면 평균 2주가 걸리던 분석 기간을 90분으로 단축할 수 있다. 경기남부경찰청을 비롯해 시도경찰청 4곳에서 도입한 합동법과학감정실을 확대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저희가 했던 분석 작업이 수사의 단서가 돼 자살로 끝날 뻔했던 사건이 전 연인이 벌인 살인 사건으로 밝혀졌을 때가 기억납니다. 범인을 찾아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만큼 보람 있는 순간도 없죠. ‘잡았습니다.’ 그 말이 제일 듣기 좋더라고요.”(박문희 보건연구관)

수원=권기범 기자 kaki@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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