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인류진화, 뜨거운 주제들]초식하던 초기 인류, 식량 떨어지자 버려진 고기 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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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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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육식의 기원

인류가 많은 고기를 섭취했다는 증거가 된 ‘ER 1808’ 화석.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소장
인류가 많은 고기를 섭취했다는 증거가 된 ‘ER 1808’ 화석. 미국 스미소니언박물관 소장
오늘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바로 식성입니다. 인류는 영장류 중 거의 유일하게 고기를 즐겨 먹는 종입니다. 하지만 인류가 이런 육식 습성을 가진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불과 몇백만 년 전의 일이죠. 그렇다면 인류는 왜 육식을 시작했을까요. 고기는 어떻게 구했을까요. 사냥 장면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 초기 인류의 사냥법?

케냐의 드넓은 벌판을 생각해 봅시다. 그런 초원에서 고기를 구하는 일은 초기 인류에게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초기 인류의 키는 100cm 정도로 지금의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와 비슷한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서너 살짜리 아이들이 초원에서 사자들을 제치고 빠르게 달리는 아프리카 영양을 뒤쫓아 가 잡는 모습이 상상되시나요. 도리어 사자 밥이 되기 십상일 것입니다. 게다가 경쟁자는 사자뿐만이 아닙니다. 치타를 비롯해 사냥감을 노리는 몸집 큰 육식동물이 초원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물을 잡기 어려우면 죽은 동물을 먹으면 되지 않을까요. 사자는 막 죽인 사냥감의 내장을 배불리 먹고 나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잠을 청하러 갑니다. 사냥감에는 내장을 제외한 나머지 살이 그대로 붙어 있습니다. 초기 인류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절대로 만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사자가 물러나고 나면 이번에는 독수리나 하이에나 떼가 몰려듭니다. 독수리 한 마리의 선 키는 100cm 정도입니다. 초기 인류와 비슷한 크기이지요. 또 두 날개를 쭉 편 길이는 180cm가 넘고 항상 무리를 지어 몰려다닙니다.

그래서 초기 인류는 사자부터 독수리와 하이에나까지, 모든 경쟁자가 말랑말랑한 내장과 고기를 다 발라먹고 간 후를 노리는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다 발라먹은 사냥감에는 뼈만 남아있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팔다리의 뼈에는 골수가 있고 머리뼈 속에는 뇌가 있습니다. 지방이 풍부한 먹을거리입니다. 게다가 이를 노리는 경쟁자는 벌레와 박테리아 정도밖에 없습니다. 이 정도는 연약했던 초기 인류도 쉽게 무찌를 수 있죠.

다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팔다리나 머리의 뼈는 매우 단단합니다. 특히 팔다리뼈는 먼 훗날 인류가 무기로 사용할 정도로 두껍고 단단합니다. 그래서 초기 인류는 돌로 뼈를 깨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후 뼈를 깨는 돌은 점점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춘 석기가 되었습니다. 호모하빌리스가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올도완 석기’(돌 두 개를 서로 마주쳐 그 돌 자체나 떨어져 나온 조각에 날을 세운 석기)는 이렇게 뼈를 깨는 데 사용한 석기로 추정됩니다.

○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새로운 먹을거리

이렇듯 초기 인류가 고기를 얻는 일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모’를 겪어가면서까지 굳이 육식을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질시대 중 홍적세(약 258만∼1만2000년 전) 기간에 아프리카는 계속 건조해졌습니다. 숲은 점점 줄어들고 풀밭이 늘어났습니다. 숲은 열매나 잎이 풍부하지만 풀밭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연히 경쟁이 점점 치열해졌습니다. 게다가 남아있는 숲 지대엔 인류의 ‘친척’ 종 가운데 하나로 몸집은 현생 고릴라의 4분의 1 정도지만 이빨은 고릴라 못지않게 큰 ‘파란트로푸스’라는 종이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파란트로푸스는 나무껍질이나 식물 뿌리까지도 먹어치울 수 있었습니다. 이빨이 연약한 초기 인류가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초기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 결과가 동물성 지방, 즉 고기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류는 언제부터 육식을 했을까요. 400만∼500만 년 전에 나타나기 시작한 초기 인류는 분명히 다른 유인원처럼 채식 위주의 식생활을 했습니다. 화석을 보면 어금니가 크고 깊숙한 모양의 턱뼈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많은 양의 음식물을 수없이 씹어 먹었을 때 보이는 특징입니다. 즉, 채식의 증거이지요.

그러나 적어도 170만 년 전쯤에는 상황이 변했다는 사실이 화석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1974년 케냐의 쿠비포라에서 발견된 ‘ER 1808’이란 화석은 사망 시기를 전후해 뼈가 비정상적으로 두꺼워져 있었습니다. 인류학자들은 이것이 뼈에 출혈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비타민A 과다증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타민A 과다증은 육식동물의 간을 너무 많이 먹으면 나타납니다. 즉, 이때는 인류가 이미 과다증 증세를 보일 정도로 많은 고기를 섭취했다는 뜻입니다.

○ 고기 먹은 후 뇌와 몸집 커져


400만∼500만 년 전의 초기 인류(왼쪽)와 300만∼350만 년 전에 직립보행을 하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인류 ‘루시’(오른쪽). 이상희 교수 제공
400만∼500만 년 전의 초기 인류(왼쪽)와 300만∼350만 년 전에 직립보행을 하며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인류 ‘루시’(오른쪽). 이상희 교수 제공
일단 고기를 먹기 시작하자 인류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지방 식품을 섭취하면서 초기 인류의 뇌가 점점 커진 것입니다. 뇌는 ‘제작비’와 ‘유지비’가 많이 드는 기관입니다. 그에 상응하는 영양 섭취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뇌가 커지면서 인류의 몸집도 함께 커지게 됐습니다.

400만∼500만 년 전 초기 인류의 뇌 크기는 현생 침팬지와 비슷한 400∼500cc였습니다. 그 뒤에 나타난, ‘손재주가 있던’ 호모하빌리스의 뇌 크기는 750cc가량으로 커졌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초기 인류의 몸집은 여전히 100cm 전후로 작았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직립보행을 했던’ 호모에렉투스에 이르러 두뇌는 1000cc, 몸집은 170cm까지 커졌습니다.

큰 두뇌와 큰 몸집을 갖춘 인류는 그제야 비로소 살아있는 동물을 잡아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뛰어난 전략과 체력, 그리고 석기 덕분에 잡을 수 있는 짐승의 수도 점점 늘어났습니다. 이런 변화는 또다시 고기 섭취가 늘어나게 했습니다. 그러자 마지막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채식에 길들여져 있던 몸이 기름진 음식을 소화할 수 있도록 유전자가 변화했습니다. 혈관에서 기름기(지질·脂質)를 제거해 피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특정한 아포지방단백질 유전자가 150만 년 전에 생겨난 것입니다. 인류가 생존에 쫓겨 어쩔 수 없이 식탁 위로 받아들인 고기는 이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상희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대 인류학과 교수 sang-hee.lee@ucr.edu  
정리=윤신영 동아사이언스 기자 ashilla@donga.com  

※ 이 글은 ‘과학동아’와 동아일보 주말섹션 ‘O₂’에 동시 연재됩니다.  
#육식#인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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